여자의 얼굴을 한 전쟁 - 일본군 ‘위안부’의 기억과 기념
용산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호국군상’, 1991년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는 고 김학순 할머니, 지난해 남산 백범기념관에 설립된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에서 소녀상을 안아주는 이용수 할머니(위 사진부터). pxhere·경향신문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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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 12번 출구로 나와, 미군기지 철조망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용산 전쟁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의 전경을 지배하는 것은 거대한 6·25전쟁 조형물이다. 그 중심에 “6·25전쟁의 고난과 고통의 상처를 표현하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호국정신을 상징화”한 청동상 ‘호국군상’이 서 있다.
“전쟁을 극복했던 각계각층의 38인을 조각”한 호국군상에서 여성은 다섯 명이다. 그들은 남성 병사의 품에 안겨 있거나 아버지와 오빠를 쫓아가는 어린 소녀, 쓰러진 어머니, 댕기머리를 한 처녀, 그리고 여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총을 든 단 한 명의 여군을 제외하면 모두 빈손으로 무력하게 대오의 끝에 위치해 있다.
전쟁은 오랫동안 남자의 일이었다 하지만 전장엔 여성도 있었다
1991년 김학순의 증언은 ‘위안부’를 여성의 전쟁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부정론자들은 수정주의 담론으로 ‘기억 전쟁’을 벌인다
그렇다. 오랫동안 전쟁은 남자의 일로 치부되었다.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진 전쟁 속 여성의 모습은 보호받아야 할 후방의 존재다. 적들에게 짓밟힌 민족의 수난이며 아픔이다. 그러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여자의 전쟁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다양한 소비에트 여성들의 기억을 형상화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그녀에게 2015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여자들은 거기에 있었다. 함께 싸웠고, 죽었고, 또 살아남았다. 여성 자신의 목소리로 재구성해낸 전쟁의 진실에 세계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 치하에서 이 책은 스탈린의 신화화된 대조국전쟁 서사의 허구를 폭로한다는 이유로 출간이 금지되기도 했다.
전쟁의 역사에서 비가시화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도 낯설지 않다. 그 하나의 이름이 일본군 ‘위안부’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항상 유보의 따옴표가 쳐진다. 가난한 식민지 여성의 성을 국가가 동원해 착취한 성노예제가, 전장의 군인들에게 제공되어 마땅한 ‘위안’으로 미화되었다는 끔찍한 모순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전후에도 이어졌다. 태평양전쟁 세대가 ‘처녀공출’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았고, 1975년 배봉기, 1982년 이남님, 1984년 배옥수와 노수복이 국내외 언론에 노출되었지만, ‘위안부’는 한국의 사회적 기억에서 여전히 가라앉은 존재였다. 식민지배가 초래한 민족 수난의 표상은 될지언정, 여성의 성적 피해라는 맥락에서 공론화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탈냉전과 민주화, 여성 운동이 만든 변화의 바람 속에서 마침내 1991년 김학순은 TV 앞에서 자신의 피해를 말했다. 여성의 얼굴을 한 전쟁의 경험이 여성의 목소리로 사회적 기억과 공적 역사에 기입된 순간이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군 ‘위안부’는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적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강력한 기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전쟁은 계속되는가? 지난달 1일 SBS 신년특선영화로 방영된 미키 데자키의 다큐멘터리 <주전장(主戰場)>은 일본과 미국, 한국을 아우르는 ‘위안부’ 부정론자들과 인정론자들 사이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억전쟁의 면면과 판도를 아주 잘 보여주었다.
혹자는 생존자들의 증언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실증의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위안소 제도의 설립과 운영, ‘위안부’ 동원에 일본군의 직간접 개입이 있었다는 실증은 1990년 무렵 이미 완결되었다. 중국, 대만, 네덜란드 등에서 발견된 추가 자료들은 이러한 결론을 보완할 뿐이다. 그런데 수정주의 담론이 날뛴다. 사회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 논의의 쟁점을 강제연행의 유무로 협소화시키고, 피해자들을 ‘매춘부’로 매도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기억전쟁은 무엇을 역사라고 부를 것인가, 나아가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둘러싼 싸움이다.
‘위안부’ 피해 경험이 여성에 대한 전쟁범죄로 말해질 수 있었던 것은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대한 사회적 열망 때문이었다.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실증은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각자의 위치에서 전쟁의 경험을 성찰하여 공동체를 위한 교훈으로 빚어내는 작업이다. 우리는 이를 ‘기념’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어떻게 기리는가 하는 기념의 풍경은 한 사회의 거울이다. 기억의 집단적 박물화가 아닌 깨어 있는 기념은 어떻게 가능할까.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삶이 과거의 오류를 유산으로 성립된다는 ‘연루’의 감각이다. 또한 무분별한 피해자 민족주의와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려면, 타자에 대한 긴장과 존중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있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에 전시된 아시아 전역의 ‘위안부’ 피해 여성 500여명의 사진. WAM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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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와세다대 캠퍼스 한쪽에는 2005년 설립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이 있다. 입구에는 아시아 전역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500여건의 자료를 목록화하고 있고, 전시는 매우 실증적이다.
그에 비해 2016년 개관한 타이베이의 ‘아마 평화와 여성 인권관(AMA Museum)’은 정서적이다. ‘아마’는 타이완어로 할머니라는 뜻이다. 타이완 ‘위안부’ 피해자 59명을 기리고 있다. 생존자들을 피해자 이미지로 고착시키는 대신 전후의 삶에 방점을 둔 사진 전시가 인상적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있는 위안소를 연상시키는 전시실. 시멘트벽에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과 영상이 흐릿하게 비친다. 정책브리핑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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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자리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지하전시관에는 ‘그녀의 일생’이라는 방이 있다. 몸을 굽혀도 간신히 들어갈까 말까 한 좁은 입구에 고개를 들이밀면, 위안소를 연상시키는 멍석과 신발이 놓여 있다. 차가운 사방의 시멘트벽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과 영상이 흐릿하게 비친다.
일본과 대만 그리고 성산동의 전시관은 호소 방법이 각각 다르다
남산기림비는 글로벌한 보편성을 담았으나 장소에 문제가 있다
‘기억의 역사화’로 또 다른 논쟁…상실된 다양한 목소리 되살려야
일본과 타이완 ‘위안부’ 기념관의 전시는 관객에게 호소하는 지점이 다르다. 피해를 대하는 거리감과 위치성의 차이에서 새삼 제국과 식민지의 간극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같은 일본 식민지였지만 소수민족 출신이 다수 포함된 타이완 ‘위안부’ 피해의 사회적 의미는 쉽사리 알기 어렵다. 여성이나 민족이라는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기념이 자기만족적 의례화에 그치지 않으려면, ‘위안부’ 기억이 가지는 지역적인 특수한 맥락과 글로벌한 보편성을 읽어내고 연계시키려는 지속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뉴저지, 페어팩스, 베르겐, 샌프란시스코, 시드니 등 해외 곳곳의 위안부 기림비들은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때문이 아니라, 그 지역의 이민자 공동체들의 공존과 화합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2019년 8월 한국, 중국, 필리핀 소녀 셋이 손을 맞잡고, 김학순이 이들을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판형 ‘위안부’ 기림비가 서울 남산 조선신궁 터 백범공원에 세워졌다. 기림비의 위치 선정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민족 영웅으로 만들어가는 최근의 기념 문화를 십분 반영한다. 그러나 백범기념관과 백범동상 옆에서, 이 기림비의 형상이 의도했던 초국적인 메시지는 맥락을 잃어버린다. 기림비 앞 매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나마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억에서 종점은 없다. 다만 지속적인 재평가만이 있을 뿐이다. ‘여자의 얼굴을 한 전쟁’을 화두로 삼는 기억의 역사화 작업은 또 다른 논쟁을 불러올 것이다. 이를 기념의 범람 속에서 상실되어 왔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사회화되는 계기로 만드는 것은 모든 기억 활동가들의 몫이다.
이헌미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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