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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이슈 미술의 세계

마음대로 글씨를 갖고 놀던 추사… 현대 미술에 영감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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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 전시회 / 특정 형태에 갇히지 않고 경계 넘나들며 / 단단한가하면 춤추는 듯한 유연함 풍겨 / 파격적인 격식으로 당대엔 조롱의 대상 / 후대에서야 예술·학문 장르로 자리매김 / 옹방강·완원 등 淸 왕조시대 작품 외 / 추사 미학 계승한 국내 조각·그림 전시

빈센트 반 고흐와 에두아르 마네, 폴 세잔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로 칭송받지만 기존의 형식을 깨는 파격미로 당대에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근자에 들으니 제 글씨가 세상 사람의 눈에 크게 괴(怪)하게 보인다고들 하는데 혹 이 글씨를 괴하다고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소.” 추사가 쓴 한 편지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추사의 고뇌가 느껴진다. 당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추사체를 법도를 벗어난 ‘괴기스러운 취미’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괴(怪)하지 않으면 역시 서(書)가 될 수도 없다”, “글씨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교가 좋고 나쁨을 따지지 마라”고 응수하며 ‘괴(怪)의 미학(美學)’을 완성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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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무진’. ‘추사 중국전’에서 이 작품을 본 우웨이산 중국국가미술관장은 “글씨를 넘어서서 그림이다. 허실(虛實)의 미학을 극대화하면서 심미적으로나 조형적으로 현대적이고 추상적이다”라고 평가했다. 간송미술관 제공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개막한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는 이러한 추사의 진면모를 집중 조명한 자리다. 이 전시는 예술의전당과 중국국가미술관이 한·중 국가예술 교류 프로젝트로 지난해 6월18일부터 8월23일까지 베이징 중국국가미술관에서 먼저 선보였다. 중국 전시는 하루 평균 5000명, 총 30만명이 방문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추사는 특정한 형태에 갇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의 글씨에서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굵은 울림은 물론 춤을 추는 듯 가벼운 리듬감마저 흘러나온다. 굵으면서도 가늘고, 단조로우면서도 자유분방하며, 비우고 채우는 공간 경영이 돋보인다. 초년과 말년 글씨가 완전히 다르고, 같은 시기라도 서체가 머물러 있지 않다. 이번 전시는 추사체의 성격 전모를 ‘연행(옛 베이징)과 학예일치(학문과 예술이 하나됨)’, ‘해동통유(유불선을 아우르는 말)와 선다일미(참선과 차를 마시는 것은 같음)’, ‘유희삼매(예술이 극진한 경지에 이름)와 추사서의 현대성’ 등 3부로 나눠 보여준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과천시추사박물관, 제주추사관 등 여러 기관이 소장한 추사의 현판, 두루마리, 서첩, 병풍 등을 중심으로 옹방강(翁方綱·1733~1818), 완원(阮元·1764~1849) 등 추사에게 영향을 준 청(淸) 왕조 시대 문인 작품까지 총 120점을 선보인다.

중국에서 열린 앞선 전시회가 추사와 중국 석학들의 교유와 수작들을 소개하는 데 무게를 뒀다면 이번 전시전은 추사의 ‘괴의 미학’과 현대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 ‘기괴고졸(奇怪古拙)’한 조형미학 특징인 추사체를 현대적인 미로 연결해 바라보려는 취지에서다. 이 같은 이유로 중국 전시전에서는 소개되지 않았던 한국 현대 작품 10점도 함께 전시된다. 한국 현대조각의 선구자 김종영(1915~1982), 단색화의 거장 윤형근(1928~2007), 서예가 손재형(1903~1981) 등 추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추사의 미학을 이어받은 작가들의 작품이다.

추사의 숨결은 현대미술에 어떤 영감을 주고 있을까.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예술의전당 시각예술부 큐레이터는 “보통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서양미술을 떠올린다. 동아시아의 현대미술은 서화다”라며 “추사를 서예 장르에 가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의 글은 학문이고 예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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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쌍·채필’. 글씨를 갖고 노는 듯한 ‘유희’의 경지는 추상표현주의와 일맥상통하는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일암관 제공


그는 “‘계산무진’과 ‘무쌍·채필’에서 보듯 글씨를 갖고 노는 듯한 ‘유희’의 경지는 추상표현주의와 일맥상통하는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사의 예술정신은 현대의 추상 표현주의와 맞닿아 있다. 서구에서 현대와 이전 미술을 구분하는 지점 중 하나가 미(美)와 추(醜)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라며 “추사 역시 정(正)과 괴(怪)에 대한 개념을 전복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동아시아 현대미술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김종영은 피카소의 큐비즘과 추사 글씨의 구축성을 비교하며 “내 조각은 추사에서부터 나온다”고 이야기해왔고, 윤형근은 추사의 획을 서양 미술의 면으로 확대해왔다.

한편 지난 1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은 우리나라에서 서예가 관심과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유 사장은 “서예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어렵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장품도 지원예산도 없는 서예박물관을 어떻게 활성화할지 고민이 많다”며 “적어도 추사 작품만큼은 국민들, 특히 청소년들이 직접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3월15일까지 열린다. 다음달 13일에는 예술의전당 주관으로 추사국제학술포럼이 열려 한·중 학자들이 추사의 예술에 대한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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