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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92년 만에 되찾은 ‘설날’···그해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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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고유명절인 ‘설날’은 오랜기간 탄압을 받았었다.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 등으로 그 이름을 되찾은지 올해가 31년째다. ‘설날’은 1989년 92년만에 ‘구습’이라는 눈총을 털어버리고 우리에서 다시금 돌아온다. 그해 국립영화제작소는 2분짜리 영상으로 제작해 국민들의 모습을 소개했다. 이 영상은 현재 국가기록원에 보관돼있다.



영상속 내레이터는 ‘아름다운 풍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설날’을 반갑게 맞는다. 이 영상은 차례음식 등을 파는 전통시장의 활기차고 부산한 모습, 그리고 예년과 다른 국민들의 밝은 표정 등을 소개했다.

남성용 한복 주문이 많았고, 특히 자녀들의 때때옷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오랫만에 서울역 귀향객들의 길게 줄을 선 모습도 보여줬다. 서울역에서 현금과 주판으로 기차표를 사고 파는 모습도 담겨있다.

강원도 횡성의 한 초등학교(국민학교)의 ‘한복 입는 날’도 자세하게 구성했다. 지금 들으면 다소 우스운 “고무신이 사라져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영상은 어린이들의 한복입기와 예절 교육을 계속해 아이들에게 한국인의 뿌리를 확인시키도록 하겠다는 초등학교 관계자의 약속으로 끝을 맺는다.

을미개혁을 기점으로 1896년 설날을 음력 1월 1일에서 양력 1월 1일로 공식화한다. 일제는 음력설을 구습이며 중국설로, 신정은 국제설이라는 논리로 홍보하며 ‘설날’을 탄압한다. 이 시절 설빔을 입을 사람은 먹물테러를 받기도 했고, 일제는 음력설에 일부러 부역을 시키거나 떡방앗간은 강제휴업토록 하기도 했다. 해방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아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가게문을 닫게하기도 하고 서울시는 구정을 앞두고 도축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은 설을 양력과 음력으로 두 번 쇠는 것을 뜻하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황당한 표현을 사용하며 음력설을 규제했다. 이 때문에 문중이나 친족간에도 신정·구정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민초들은 일제 저항과 전통 중시의 마음으로 양력설보다 음력설을 쇘다. 결국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고 12대 총선을 코 앞에둔 1984년 여당인 당시 민정당은 ‘국민 표심’을 의식해 음력설을 ‘조상의 날’이라며 공휴일로 지정하자고 제안하다. 1985년 12월 국무회의에서는 ‘조상의날’로 의결하고 단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했다. 이후 1989년에는 조상의 날이라는 날 명칭도 사라지고 공휴일도 하루에서 사흘로 늘어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설날의 유래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신라 비처왕 때(BC488년) 정월 초하룻날 설을 쇠었다’는 기록이 있다. 설날은 한 해를 끝내고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설다’ ‘낯설다’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상호 선임기자 sh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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