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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인재양성, 그리고 개척자.
지난 14일 94세의 일기로 타계한 상남(上南)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다.
이 단어들이 말해주듯 대한민국 화학·전자 산업의 중흥을 이끈 그는 뼛속까지 기업가였다. 재계는 일제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면서도 결코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기업가 정신을 추모한다. 그가 지켜왔던 경영철학은 점차 활력을 잃어가는 오늘의 한국경제에 적잖은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평가다.
1970년 그룹 회장에 취임 이후 구 명예회장의 어록 가운데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혁신’과 ‘인재’였다. 그는 기업 본연의 사명을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라 규정했다. 구 명예회장에게 혁신은 기업이 사회 속에서 그 역할을 다하는 길이었다. 혁신이 이룬 과실은 많은 사람들의 복된 생활과 사회복지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생산기업을 시작하면서 항상 마음에 품어온 생각은 우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는 당시 언론 인터뷰는 이런 철학의 연장선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오늘날 주요 기업들이 강하게 외치는 사회적 가치를 미리 실천한 선구자였다. ▶관련기사 4면
구 명예회장이 외친 혁신은 구호에 그치지 않았기에 더욱 값지다.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의 재임 기간동안 최초의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냈다. ‘가전은 LG’라는 오늘의 명성은 그때 다져졌다.
구 명예회장은 또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기업을 자본 시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는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됐던 때였다. 아울러 그는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하는 등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질적인 성장 사례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인재와 기술에 대한 부단한 관심 또한 구 명예회장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는 1982년 그룹사보에서 “기업의 가장 원천적이고 최종적인 요소는 사람 그 자체”라고 했다. 이후 1988년 ‘기업의 백년대계를 다지는 가장 확실한 투자’라 강조하며 인화원을 열었다.
이들 인재들이 기술인으로 커나갈 공간도 빠르게 만들어졌다.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고 한 그는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토록 했다. 구 명예회장의 재임 기간 70여개의 민간연구소가 지어졌다. 냉철한 승부사인 동시에 그는 따스한 자연인이었다. 19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당시 재계에서 전례가 없던 무고(無故) 승계를 단행했다. 이는 당시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구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재계는 그의 기업가 정신을 적극 재조명하고 있다. 한편, 4일장인 장례는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7일 오전이다.
정순식 기자/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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