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1 (월)

音과 香을 만드는 손… '비창'엔 달콤쌉싸름한 향이 나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지휘자이자 조향사, 파비오 루이지]

13일 KBS교향악단과 특별 공연, 차이콥스키 등 명연주 펼쳐 호평

메트·빈 심포니 등 유명악단 지휘… 8년 전부터 직접 향수 제조·판매

"음악과 향기의 핵심은 밸런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악기'다. 이탈리아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60)와 KBS교향악단의 지난 13일 공연은 기초 체력이 튼튼한 악단이면 능력 있는 지휘자를 만났을 때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과, 루이지가 왜 좋은 지휘자인지를 확인한 무대였다.

취리히 오페라와 덴마크 국립 교향악단, 피렌체 5월 음악축제의 수장인 루이지는 '꿈의 무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2017년까지 6년간 이끈 명지휘자다. 독일 최고(最古) 명문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빈 심포니, 라이프치히 MDR심포니,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를 책임졌고, 내년부턴 미국 댈러스 심포니의 지휘봉을 잡는다.

조선일보

파비오 루이지는 지휘봉 대신 열 손가락 모두를 열 개의 지휘봉처럼 쓴다. “지휘자는 손에 악기를 들고 있지 않아요. 단원들에게 그 뜻을 정확히 전달하려면 동작이 커질 수밖에 없죠.” /KBS교향악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루이지가 만들어낸 앙상블로 빈틈없이 차올랐다. 지난해 10월 KBS교향악단과 처음 만나 난해하기로 이름난 브루크너 교향곡 9번으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던 그는 두 해 연속 '홈런'을 쳤다. 글린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 때부터 객석은 흥분에 사로잡혔다. 전속력으로 격렬한 악상을 내지르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음표들을 빠짐없이 챙겨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었다.

하이라이트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오페라단에서 피아노 반주를 오래 한 그는 악단과 성악가가 언제, 왜 숨을 쉬어야 하는지 알고 절묘하게 맞출 줄 아는 음악가다. 지휘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 총보를 한눈에 파악해 한 화음으로 펼치는 훈련을 꾸준히 한 덕에 구조를 파악하는 시야가 정교하면서도 넓다. 금요일 밤 비를 맞으며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공연 전 만난 루이지는 "지난 5년 KBS교향악단을 이끌어온 요엘 레비가 잘 훈련해놨기 때문에 가능한 연주였다"며 동료에게 공을 돌렸다. '넘버 원' 악단을 수없이 지휘했지만 "새롭게 바꾸고 채워나갈 수 있는 악단이 더 좋다"고 했다. "잘난 악단은 경험이 많아서 반응을 좀 더 빨리한다는 장점뿐,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악단은 무슨 곡을 하든 궁금해하고 열정적이어서 할수록 뿌듯하기 때문"이란다.

조선일보

지난 13일 예술의전당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을 연주하는 루이지(왼쪽)와 KBS교향악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휘자 루이지는 조향사이기도 하다. 8년 전부터 직접 향수를 만들어 판매까지 한다.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연습 때에도 빳빳한 셔츠에 보타이를 매고 나타나는 그는 "조부모님과 엄마, 삼촌이 모두 재단사였다. 손끝에 닿는 패브릭의 질감을 좋아한다"며 재킷을 만지작거렸다. "시각·후각·촉각 등 모든 감각이 예민해요. 특히 냄새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매개체여서 악기를 배우듯 수업을 받았죠."

그는 "음악을 만드는 것과 향기를 만드는 작업이 비슷하다"고 했다. "핵심은 밸런스인데, 모든 재료의 혼합인 향수처럼 악단도 서로 다른 악기와 인격을 하나로 묶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나도록 녹이는 게 목표예요." 차이콥스키의 '비창'은 "'달콤쌉싸름(sweetbitter)'한 향기가 난다"고 했다. "세상에 안녕을 고하는 마지막 악장에서 비탄과 애상이 몹시 쓸쓸하게 다가와요."

지휘에, 향수에 몸을 열 개로 쪼개도 모자라지만 "대충 할 거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겠다" 단언하는 '완벽주의자'다. "열차 기관사였던 아버지는 '열심히(harder)만으론 안 된다. 죽도록(hardest)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어릴 땐 몰랐다. 왜 네 살도 안 된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지, 집에 중고차 한 대 없는지, 남들 다 가는 휴가를 못 가는지. 삶의 우선순위를 아들에게 뒀던 부모의 숭고한 희생으로 '지휘자 루이지'는 탄생했다.

"'어느 분야든 최고가 되겠다 맘먹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했던 말씀이 쟁쟁해요. 제가 지휘하는 걸 무척 자랑스러워하신 두 분을 위해서라도 저는 오래오래 지휘할 겁니다."

[김경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