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소송’ 국내 첫 재판
“잊지 않을게요” 중국 난징시 ‘리지샹 위안소 옛터 진열관’(위안부 자료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일본이 세운 최대 규모의 위안소였던 이곳은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성범죄와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록하자는 차원에서 2015년 자료관으로 만들어졌다. 박영심 할머니(1921~2006)는 2003년 이곳을 방문해 자신이 갇혀있던 곳이 맞다고 증언했다. 건물 안에는 위안소에서 사용한 약병과 조잡한 성병 검사도구들이 전시돼있다. 난징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재판 거부 ‘피고 일본’ 그럼에도 죄를 묻는다
이길까. 이겨서 뭐할까. 재판에서 이긴다는 것은 승소 판결문을 받는 것을 말한다. 원고라면 소장에서 주장한 청구내용을 실행할 수 있는 것. 피고라면 원고가 주장한 청구내용이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이 소송은 좀 다르다. 다를 수 있다.
지난 13일 한국 법정서 열린
첫 위안부 피해자 손배소송
일본은 무시 전략으로 일관
…
‘무의미한 소송’ 시선을 딛고
‘진실 위한 싸움’ 다시 첫걸음
2019년 11월13일.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이 시작됐다. 2016년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만이다.
이번 재판은 한국 법원에서 열린다. 피고는 일본국이다. 일본의 불법행위에 대해 한국 법원이 내리는 판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은 이 재판의 성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송서류를 받는 것조차 거부해, ‘공시송달’(피고가 소송서류를 접수하지 않아 법원이 게시판이나 관보에 공고를 통해 소송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이라는 절차를 통해 재판이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한국 법원이 일본 정부의 주권행위에 대해 재판할 권리가 없다(국제관습법상 국가면제론)”며 한국 정부에 “소송을 각하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 재판의 피고석은 비어있고, 재판이 끝날 때까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 법원이 “일본국은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려도 일본은 무시로 일관할 가능성이 높다. 판결만을 근거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자산을 동결하거나 강제 집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지 않다.
2012년 국제형사재판소(ICJ)가 다룬 비슷한 사건(그리스·이탈리아 vs 독일)의 판결(독일 승소)을 보면, 지금까지의 국제법 관습에선 일본이 유리한 상황이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1997년 소천)가 “내가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증언한 지 28년 만에 열리는 이 소송은 단순히 한·일관계를 떠나 복잡한 국제법과 국제사회의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 그러나 우리는 계란이 아니며 그들도 바위는 아니다. 2016가합80239. 고(故) 곽예남 할머니 등 20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위안부 피해소송이 시작됐다.
◆일본이 믿는 구석 ‘국가면제론’…비겁한 가해자는 ‘장벽’ 뒤에 숨었다
“내 마음은 지지 않아” 2018년 2월 서울시청 ‘꿈새김판’에 새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1922~2017)의 말. 재일한국인으로 1993년 일본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한 송 할머니는 “재판에서 졌지만, 내 마음은 지지 않아”라는 말을 남겼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16년 첫 소송 제기 후 소장 송달을 거부해온 일본…87년 만에 열린 재판, 결국 ‘피고석에 피고는 없다’
국가가 행한 주권행위는 다른 나라에서 재판받지 않아도 된다는 오랜 국제관습 ‘국가면제’
2012년 국제형사재판소, 전범국 독일에 ‘면제권’ 인정…“인권침해 심각성 판단요소 제외한 판결” 비판
2014년 이탈리아 헌재의 “반인륜적 범죄행위 재판권 제한은 위헌” 판결은 ‘정의의 간극 좁히려는 시도’ 평가
절대적이었던 규칙 점점 깨져…“인권지향적 가치 보호 위해 제한적 범위 내 배제” 주장 설득력 얻어
이번 소송은 2016년 12월 제기됐다. 소송절차를 시작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법원에 소장을 내고, 법원행정처가 헤이그송달협약(민사 또는 상사의 재판상 및 재판외문서의 해외송달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일본 외무성에 소장 송달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2019년 1월까지 총 세 번에 걸쳐 송달을 거부했다. 법원과 피해자 측 변호인단은 2년 넘게 여러 방안을 두고 고심했다. 외교부를 통한 보충적 송달 방법부터 우편송달, 소송 당사 대표자인 일본 법무대신을 찾아가 인편으로 전달하는 방법 등이 논의됐다.
고심 끝에 법원은 지난 3월 ‘공시송달’ 명령을 내렸고, 5월9일 효력이 발생했다. 공시송달은 피고가 법정에 나오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재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호인단에서도 가장 피하고 싶었던 방법이었다. 공시송달 효력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법원의 절차에는 일절 응하지 않은 채, 한국 외교부에 “소송이 각하되길 바란다”는 의견만 전달했다. 일본이 중국 상하이에 첫 위안소를 설치한 것이 1932년. 그로부터 87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첫 위안부 피해소송은 이렇게 가해자의 완벽한 무시 속에 시작됐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 ‘국가면제’라는 큰 산
법정에선 “가해자 나빠요” “가해자 잘못이 맞아요”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법적 책임도 물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사실과 증거,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특히 민사소송에선 소송을 제기한 원고가 피해를 입증할 책임을 진다. 억울해도 그렇다. 국제소송은 더 까다롭다. 70~80년 전에 자행된 전쟁범죄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이번 소송은 더 고약하다. 재판요건이 성립되는지부터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믿는 구석은 ‘국가면제(State Immunity)’라는 관습법이다. 국가가 행한 주권행위는 다른 나라에서 재판받을 책임에서 면제된다는 것으로 국제사회에서 확립된 규칙이다.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소송의 첫 변론기일에서 재판장(유석동 부장판사)도 변호인단에 “이 사건은 ‘국가면제’라는 장벽이 있다”며 “국가면제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재판은 먼저, 소송 진행에 절차상 문제가 있는지(원·피고의 자격 등)를 따진 뒤 실체 파악에 착수하기 때문에 일본이 주장하는 국가면제이론이 받아들여진다면 소송은 각하되고 일본군 위안소 운영이 피해자들에게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는 심리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국가면제는 성문화된 국제법이 아니라 관습법이기 때문에 어떠한 문서에도 명확히 규정돼 있진 않다. 역사의 발전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이 면책특권은 원래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라고 불렸다. 근대국가 성립 이전에는 주권이 왕에게 있다고 보고, 왕(주권)은 재판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이후에는 각 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각 나라의 주권을 존중해 주권행위에 대해서는 타국에서 재판받지 않도록 하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절대적이었던 국가면제론은 점점 깨지고 있다. 국가의 역할이 다양해지면서, 국가의 행위 중 상업적 활동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론이 적용될 수 없는 쪽으로 바뀌었다.
국가면제 개념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외교관들의 교통사고 처리문제다. 외교관들이 각 발령국가에서 일으킨 교통사고를 처리할 때 과거에는 국가면제론을 통해 면책을 부여했지만, 지금은 ‘보험’으로 처리한다.
특히 2000년대 들어 국제법에서 주요하게 논의되는 쟁점 중 하나는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국가면제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이 전쟁 중 일으킨 대표적 성범죄인 ‘군위안소 운영’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변호인단은 주장한다. 반인권범죄나 전쟁범죄는 국가면제가 처음 도입될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문제들이다. 관습법인 국가면제를 국내법에 적용시키느냐는 나라마다 다른데, 일본은 2009년부터 국가면제에 관한 법을 만들어 적용하고 있다. 이 법은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한국은 국가면제에 관한 입법을 따로 하지 않았다.
■ ‘이탈리아·그리스 vs. 독일’ 사건
위안부 피해소송과 유사한 소송이 이미 유럽에서 진행됐다. 1944년 8월 독일군에게 체포돼 1945년 4월까지 독일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한 이탈리아인 페리니가 1998년 독일 정부를 상대로 이탈리아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때도 국가면제론이 쟁점이 됐고, 이탈리아 1·2심 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탈리아 대법원은 2004년 “독일군의 행위는 보편적 가치를 침해하는 국제범죄에 해당하고, 강행규범(누구나 상식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보는 보편적 원칙)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모든 국가들이 보편적 민사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판결이 나왔다. 1944년 독일군이 그리스 남부 디스토모 마을 인근에서 자행한 민간인 대량학살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이 독일 정부를 상대로 그리스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그리스 법원 역시 “이런 살육행위는 무력분쟁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고, 강행규범을 위반한 독일은 국가면제를 묵시적으로 포기했다고 본다”며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독일은 2008년 이탈리아를 국제형사재판소(ICJ)에 제소했다. 그리스가 2011년 이 사건에 참가신청을 하면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이탈리아·그리스 vs. 독일’의 국제소송이 시작됐다. 쟁점은 국가면제론 적용 여부였는데, 이 재판은 독일의 승소로 끝났다. ICJ는 2012년 재판관 15명 ‘12 대 3’의 의견으로 “이탈리아 법원이 독일에 제기된 민사소송을 허용한 것은 국가면제 특권을 존중할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논란이 됐다. ICJ가 반인도적 범죄까지 국가면제를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사실상 정면으로 심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ICJ는 ‘절차상’ 한 국가의 주권행위에 대해 타국에서 재판하는 관행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 사건에서도 독일의 면책특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에둘렀다. 야마모토 세이타 일본 변호사는 “이런 방식이라면 관습국제법에 대해서는 늘 부정적(보수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며 “조사 자체도 체리 피킹(결론을 위해 자기 형편에 맞는 사례만으로 추출하는 궤변)이었다는 비판도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가 된 인권침해의 심각성은 판단요소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당시 소수의견을 낸 재판관들도 국가면제란 ‘유동적’이며, 이런 사건에서 국가면제를 인정할 경우 형식적 절차에만 집중해 피해자의 인권과 실질적 피해회복이라는 중요한 부분은 놓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소수의견을 낸 유수프 재판관은 “국제공동체의 인권지향적 가치를 보다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선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국가면제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송을 제기한 이탈리아인 페리니의 경우 전쟁포로로 인정받지 못해 독일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전쟁 범죄 책임을 적극적으로 지는 것으로 알려진 독일도 개개인의 피해회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국가 간 협정을 통해 보상과 배상을 진행하기 때문에 정부의 협상 한계로 이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개개인의 노력으로 자신의 피해를 입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가면제 관습법에 따라 이런 소송까지 막아버린다면, 피해자 개인은 어떤 구제수단도 가질 수 없게 된다.
황명준 박사(서울대 법학)는 2017년 8월 발표한 논문 <국제법 위반의 중대성에 따른 주권면제 부인 가능성>에서 “소속 국가의 역량 한계로 인한 위험 부담을 온전히 희생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실행 역시 국제법상 정의 관념에 부합하기 어렵다”며 “ICJ의 다수의견은 과도한 형식주의의 소산이라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밝혔다.
ICJ 판결 이후 이 사건은 어떻게 됐을까. 여기서 다시 주목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2012년 8월 ICJ의 판결에 따라 독일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파기했다. 이탈리아 행정부는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이탈리아 법원에서 재판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었다.
그런데 유사한 피해소송이 계속되자, 피렌체 지방법원의 한 판사가 독일의 전쟁범죄 피해를 심리할 수 없도록 만든 법안에 대해 위헌심판을 제청했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2014년 위헌결정을 내렸다. 이탈리아 헌재는 재판관 12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불가침의 인권을 침해하는 전쟁범죄 및 반인륜적 범죄를 구성하는 외국국가 행위에 대해 판사들이 재판권을 부인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밝혔다. 헌법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명시하고 있고, 재판을 받을 권리는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위한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권리인데 ICJ 판결을 근거로 반인륜적 범죄피해자들의 재판받을 권리를 막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는 취지였다.
이탈리아 헌재 판결 역시 여러 논란을 낳았다.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최후의 수단’으로서 피해자 권리 구제에 기여한다는 긍정적 해석도 나왔다. 재판당사국이자 가해자인 독일에서도 곱씹어볼 만한 평가가 나왔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미하엘 보테 명예교수는 “국내 최고법원이 국가의 국제법적 의무보다 헌법적 가치를 선호하는 것은 다른 국가기관에 딜레마를 야기한다”면서도 “이탈리아 헌재 판결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질러진 국제적 범죄의 희생자 처우에 관한 규정에 있어 ‘정의의 간극(justice gap)’을 좁히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국제법질서의 정당성을 위해 국가적 구제책의 중요 기능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ICJ 판결의 본질적 결함인데, 이탈리아 헌재는 오늘날 국제사회의 가치체계 초석을 형성하는 헌법적 원리에 의지함으로써 이러한 결함을 고치려 하였다. 이탈리아 헌재 판결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정부 관료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 결과 처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 소송하는 건 최후의 구제 수단이기 때문”
“우리가 증인이다” 이용수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이옥선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2019년 11월13일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일본군 위안부 손해배상청구소송 첫 변론기일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송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소장 송달을 거부해 소송이 제기된 지 3년 만에 처음 열린 이날 재판에 피고(일본 정부)는 참석하지 않았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한국에서 배상 판결이 나오면
만일 한국에서도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 우선 위안부피해소송이 ICJ로 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 2012년 ICJ ‘이탈리아·그리스 vs. 독일’ 판결에 비추어 일본은 이 문제를 ICJ에 사건화하려 할 수도 있지만, 한국 정부가 이에 응하지 않으면 재판은 열릴 수 없다. 따라서 위안부피해소송의 사법적 판단은 국내 법원에서 머물 가능성이 높다.
위안부피해소송이 국내법원의 판결에서 끝난다는 것은 이번 소송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법원에서 일본의 국가면제론을 배척하고, 일본 정부에게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판결을 선고한다 한들 실제 배상을 받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한국 영토 내 일본 정부 자산에 대한 동결이나 집행조치를 하려면, 배상판결과 별개의 사법절차가 또 필요하다.
앞서 전한 그리스 피해자들의 경우, 그리스 법원의 배상판결을 근거로 그리스 내 독일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신청했으나 그리스 법원은 “외국국가에 대한 강제집행은 법무부 장관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며 기각했고, 그리스 법무장관은 강제집행에 동의하지 않았다. 본안소송이든, 실질적 피해구제를 위한 추가 절차든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피해자들은 이미 고령이다.
“국가면제는 아직 공고한 관습법”
일본서 제기한 소송은 다 패소했고
한국 법원서 배상판결이 난다 해도
일본에 배상받을 가능성은 낮다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전문가는 “2012년 ICJ 판결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국제사회에서 ‘국가면제’는 아직까지 깨지기 쉽지 않은 관습법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한국이 이 관습법을 깨고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릴 경우 외교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문가는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이후 지속적으로 전쟁피해 보상을 두고 논의해왔고, 법적구속력은 없지만 2015년 박근혜 정부 때도 일본 정부와 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한 공식 합의를 발표했기 때문에 결코 우리가 유리한 입장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한 국제법 전문가는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피해자 승소, 일본기업 배상) 이후 한·일관계가 격화된 것처럼 위안부피해소송이 확정되면 일본 정부는 이를 빌미로 또다시 반발하고 한·일관계는 더욱 경색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이 전쟁범죄에 대해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가해자’의 입장에 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직 정식으로 분쟁화된 적은 없으나, 한국 군인이 베트남전 참전 당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베트남 피해자들이 역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 그럼에도 한국 법원에서 위안부 소송을 하는 이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위안부피해소송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대응 태스크포스(TF)’에서 담당하고 있다. 이 TF에는 21명의 변호사들이 참여하고 있고 변호인단 역시 이번 소송의 어려움과 한계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법원에서 위안부피해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변호인단은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를 위한 마지막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주장을 이해하려면 위안부 피해 해결을 위한 지난한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전후 56년 만인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위안부였다”고 공개증언하면서 수면위로 떠올랐다. 일본이 전쟁 중 군위안소를 운영한 사실은 암암리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위안부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김 할머니의 증언 이후 한국은 물론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에서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일본의 범죄 사실 인정·법적 책임
공식 사죄·명확한 재발 방지 약속
이를 판결문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당연히’ 일본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일본에서 제기한 소송은 100여건에 이른다.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참여한 소송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참여한 소송을 포함해 총 4건이다. 4건의 소송은 모두 피해자 패소로 끝났다. 각 사건들은 모두 3심까지 진행됐다. 그중 김학순 할머니가 포함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소송’의 경우 2003년 도쿄고등재판소(2심)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했으나, 제척기간(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이 소멸했다는 이유로 결론적으로는 패소 판결을 내렸다.
‘부산 일본군위안부 소송’의 경우 1998년 1심에서 “고노 담화 이후 특별입법이 지연된 것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30만엔을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 판결이 나왔지만,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승소 판결을 받은 1심 재판은 영화 <허스토리>(2018, 민규동 감독)로 제작됐다. 두 번의 재판 외에는 모두 일본군 위안부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 판단보다는 ‘개인이 전쟁범죄에 대해 민사청구를 할 수 없다’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는 책임이 없다(국가무책임법리)’ 등을 이유로 패소판결이 내려졌다.
일본에서 이 소송들의 최종 결과가 나온 것이 2004년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번엔 한국 정부의 책임을 확인했다. 2006년 헌법재판소에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들이 일본에 가지는 배상청구권이 사라졌다고 봐야 하는지를 묻는 동시에 한국 정부가 이 협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 것(부작위)이 위헌인지를 구하는 소송을 청구했다.
헌재는 2011년에서야 “일본국에 의해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배상청구권은 헌법상 보장되는 재산권일 뿐만 아니라, 그 배상청구권의 실현은 무자비하고 지속적으로 침해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신체의 자유를 사후적으로 회복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피청구인의 부작위로 인해 침해되는 기본권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했다. 위안부 피해 해결에 대한 한국 정부의 책임을 명시한 것이다.
“역사가 증거다” 2019년 11월6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1412차 수요시위’에서 한 시민이 “우리가 증인이고 역사가 증거”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피해자들은 다시 정부가 나서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함께 발표한 ‘위안부 문제 타결’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보통의 국제조약이 따르는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법적 구속력이 없었으며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특히 피해자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에 관한 결정권을 사실상 모두 넘겼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치 못했다.
피해자들은 2016년 12월 서울중앙지법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TF 소속 이상희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했으나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했고, 차후 또 일본에서 재판을 진행한다고 해도 실체 판단 없이 ‘재판을 청구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로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해결해주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그것조차 되지 않아, 결국 최후의 구제수단으로 한국 법원에서의 재판을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TF의 류광옥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세 가지”라며 “일본국이 군위안부를 운영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법적 책임을 묻는 것,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 그리고 다시는 이런 범죄가 재발되지 않을 것이라는 명확한 약속”이라고 밝혔다. 연구자료나 의견서가 아닌 ‘법적책임을 담은 판결문’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사실로 기록해두고 싶다는 뜻이다.
한국 법원이 소송절차를 개시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피해자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국가면제에 관한 법안을 따로 만들지 않았고 사안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 변호인단은 일본의 전쟁피해 책임 해결을 촉구하는 일본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소속 전후보상특별위원회 변호사들과 협력하고 있다. 국제인권법 전문가인 아베 고우키 교수(가나가와 대학)와 백범석 교수(경희대 국제법)가 전문가 증인으로 나와 ‘국가면제’에 관해 증언할 예정이다. 백 교수는 “국가면제가 일견 확립된 국제관습법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국가면제에 대한 국가관행은 계속 변화하고 있고 특히 국제법은 ‘인권’이라는 가치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발달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현대 국제법에서 피해자들에게 보장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권리”라며 “위안부 피해자들에겐 이번 재판이 피해 구제에 유일한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수지만 학계에서도 위안부 피해소송에는 국가면제론을 적용해선 안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문영화 교수(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는 2019년 10월 법학전문지 ‘저스티스’에 기고한 논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서 재판권 행사’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주권면제에 관한 관습국제법을 적용해 우리 법원의 재판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일찍이 우리 헌재에서 판단한 바와 같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체적 권리에 대한 판단을 하지도 않은 채 그 배상청구권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이 된다”고 밝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재판장님, 너무 억울합니다”
지난 13일 어렵게 열린 첫 공판서
이용수 할머니는 무릎을 꿇었다
한국에서 열리는 위안부 소송은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1992년 1월 아사히신문은 일본군이 군위안부 운영에 관여했다는 사료를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입수해 보도했다.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조사를 진행한 뒤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현저하게 훼손한 문제”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와 입장은 계속 후퇴했다. 유엔이 여러 차례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에 피해 해결에 나설 것을 권고했지만, 일본 외무성은 ‘2019 외교청서’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11월13일 어렵게 열린 첫 공판에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1)는 재판장 앞에 무릎을 꿇고 “너무 억울하다”며 오열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어쩌다 피해자가 한국 법정에서 한국 판사에게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상황에 이르렀을까. 전쟁이 끝난 지 74년, 위안부 최초 증언이 나온 지 28년 동안에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김복동 할머니 등 피해자 6명은 소송이 시작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 법원에서 열리는 위안부피해소송은 과연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다음 재판은 2020년 2월5일 열린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일본은 사죄하고 싶다-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오누마 야스야키 지음·정현숙 옮김, 2008년
·헌법재판소 2006헌마788전원재판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3조 부작위확인, 2011년
·국제사법재판소(ICJ), 국가면제 사건 ‘독일 vs. 이탈리아·그리스 소송 참가’, 2012년
·외국국가의 재판권면제에 관한 연구-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관련해 /이영진(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법학박사), 2014년
·국제법 위반의 중대성에 따른 주권면제 부인 가능성 /황명준(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박사논문, 2017년
·일본에서의 일본군 ‘위안부’ 소송 /김창록(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성가족부·경북대 주최 일본군 위안부 학술심포지엄 발표, 2018년
·일본군 ‘위안부’ 소송에서의 국가면제 /야마모토 세이타(일본 변호사), http://justice.skr.jp, 2019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서 재판권 행사 /문영화(서울대·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스티스, 2019년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최신기사
▶ 기사 제보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