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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토)

이슈 미술의 세계

도서관·서점·녹지…`사소한 공간`에서 우린 재앙에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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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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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시카고에 '대폭염'이 닥쳤다. 7월 14일부터 일주일 동안 739명이 목숨을 잃은 이 재앙은 이 마천루의 도시가 가진 취약성을 다각도로 노출시켰다. 연구진은 사망자들의 인구학적 데이터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우선 여성이 남성보다 이 사태를 훨씬 더 잘 견뎌냈다. 이는 여성이 친구나 가족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이었다. 라틴계 사람들도 비교적 빈곤층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타인종 집단보다 이 사태를 잘 이겨냈다. 특정 아파트 단지나 집단촌에 몰려 살았고 이 환경이 혼자 쓰러져 죽는 상황을 예방해준 탓이다. 사망률이 가장 높은 지역 10곳 중 8곳은 사실상 흑인 거주지였고 빈곤과 강력 범죄가 집중된 지역이었다. 그런데 사망률이 가장 낮은 지역 10곳 중 3곳 또한 가난하고 폭력적인 데다 흑인 거주자가 대다수인 동네였다.

이 모순된 숫자를 본 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뉴욕대 사회학과 교수)는 컴퓨터를 끄고 현장으로 나가 답을 찾았다. 어느 지역은 버려진 공터와 빈집만 즐비했고, 어느 지역은 상점과 공원에 사람이 북적이고 활기가 돌았다. 고립된 사람들은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답은 사회적 인프라의 격차였다. 즉 사람들이 교류하는 방식을 결정짓는 물리적 공간 및 조직이 재앙에 맞서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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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발견은 공동체를 더 신경 쓰는 문화의 차이가 두 마을을 가르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조악한 사회적 인프라가 원인이 되어 사람들의 교류를 억제했다. 저자의 출세작인 '폭염사회'가 제기한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책을 탈고한 뒤 그는 시카고를 넘어 세계의 사회적 인프라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전 세계는 더 분열하고 있으며 사회 갈등은 심해지고 사회적 접착제는 약해지고 있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재앙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미국의 분열을 한층 깊어지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사회불안이라는 유령은 지구 전역의 도시, 공동체, 캠퍼스를 떠돌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다른 이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고 있다고. 사회학자로 그의 목표는 이 사회적 단층선을 접착시키는 것이 됐다. 해결책은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경제 발전. 하지만 경제성장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공유될 때만 사회를 응집시킬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사회적 인프라의 재건이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건설하는 것이 분열한 사회를 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그는 믿었다.

기념비적 저서 '나 홀로 볼링'에서 로버트 퍼트넘은 시민들이 스포츠 경기나, 사회생활에서 물러나 거실에서 TV만 보는 풍경을 우려했다. 20년이 흐른 지금은 그조차도 공상적 판타지가 됐다. 슈퍼볼이나 오스카 시상식이 아니면 식구들조차 각자의 방에서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회적 인프라는 공공시설인 도서관, 학교, 공원만 말하지 않는다. 인도와 녹지도 아우르며 카페나 식당, 술집, 서점 등 상업 시설도 '제3의 공간'(편하게 들러 시간을 보내는 장소) 역할을 할 때는 포함된다. 심지어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지하철도 '일시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승객들은 지하철 안에서 다양성과 다른 이의 필요성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 경험은 사람들의 협동과 신뢰를 키워주고 집단 정체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깬다. 반면 엘리트 클럽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미국-멕시코 간 장벽, 검문소 등은 반사회적인 인프라다. 갈라놓은 구성원끼리 모여 정치적 활동과 차별, 불평등을 조장하며 심지어 폭력 사태를 부추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해외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회적 인프라를 만난 경험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장이었다. 아들의 축구 경기에 참여하면서 지역 주민과 뜻 깊은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도하와 예루살렘에서는 전통시장인 수크에서 펼쳐지는 문화 활동에 자석처럼 끌렸다. 중국에서는 이른 아침 도시 곳곳 공원에서 태극권 수련이나 그룹 댄스가 열린다. 노년의 중국인 수백 만명이 사회적·신체적 이익을 얻는 활동이다. 멕시코 소칼로, 스페인 플라사 등 각국의 광장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은 가장 저평가된 사회적 인프라다. 거의 모든 도시에서 특히 고령자들에게 북클럽, 영화 상영 등을 함께하는 문화센터이자 친목 도모의 장이다. 도서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장소다.

저자는 튼튼한 사회적 인프라야말로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경제성장에도 일조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 가격 상승 및 상업 발전, 사회적 활동의 폭발적 증가를 몰고 온 로어맨해튼의 하이라인이 대표적인 예다. 애틀랜타의 벨트라인은 도시를 감싸는 35㎞의 철로 주변을 공원과 공공미술, 저소득층 공공주택 등으로 재단장시켰다. 뉴올리언스의 라피트그린웨이도 원래대로라면 분리되었을 사람들과 지역을 연결할 목적으로 설계한 자전거 보행자 겸용 도로다. 보스턴의 빅디그는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위에 녹지를 조성했다. 주지해야 할 사실은 하이라인 같은 프로젝트는 세심한 설계와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 무엇보다 공공 부문의 깨어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2016년 대선에서도 트럼프와 힐러리 모두가 동의했던 공약이 인프라에 쏟을 막대한 예산이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전 세계는 수조 달러의 인프라 투자를 집행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연결'을 염두에 둔 사회적 인프라의 재건이 필수 과제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이 방대한 책을 통해 논증한다. 1급 논픽션 작가가 세계 곳곳에서 경험한 살아있는 도시와 죽어가는 도시 이야기만으로 흥미진진한 책이다. 제목은 앤드루 카네기가 후원해 지은 전 세계 2800개의 도서관을 가리켜 한 말에서 빌려왔다. 원제는 '모든 이들을 위한 궁전'.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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