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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말모이 100년, 내가 사랑한 우리말] [9]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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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조선일보

멋, 멋쟁이, 멋지다, 멋스럽다. 내 삶에서 가장 중심이 된 말들이다.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나라마다 여성을 찬양하는 말들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미국 사람들은 ‘섹시(sexy)’, 그러니까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을 선호한다.

프랑스 남성은 '마담', 즉 우아한 여성을, 일본인들은 귀여운 여인을 사랑한다. 우리나라는 '멋쟁이'다. "멋있어" "멋쟁이야"라며 감탄한다.

70 여생을 옷을 통해 우리나라 여성들을 멋있는 여성으로 만들려고 열중해 왔다. 멋은 안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이다. 사전에는 '차림새, 행동, 됨됨이 등이 세련되고 아름다움, 맵시가 있음'으로 적혀 있다.

나는 옷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서 옷이 사람보다 먼저 걸어나오면 안 된다고 늘 주장해왔다. 옷은 그 사람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 역할일 뿐, 값비싼 옷을 입는다고 멋쟁이가 되는 건 아니다. 멋이 있으려면 우선 지성이 풍부하고, 생각이 세련되고, 겸손해야 한다.

조선일보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나는 어려서부터 인생을 멋있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꿈 많던 사춘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20대 초반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 6·25 전쟁을 맞이했다. 부산 피란 생활을 하며 깨달은 것은, 멋있는 삶은 어떤 환경에서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멋진 인생 또한 사치스러운 삶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능력, 체력 그리고 재력의 한계를 알고 10% 정도의 여유를 두고 살아야 멋을 유지할 수 있다. 타인을 비판하는 데만 관심을 두지 않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사물을 사랑하고 아끼고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멋은 우러난다.

직업상 일찍 고객을 대하게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거부감을 주는 손님을 대하는 일이었다. 아침 예약 손님 리스트에 그 이름이 있으면 우울해졌다. 직업을 계속하려면 이 산을 넘어야 하니 고민 끝에 해법을 찾았다. 그 사람의 단점 대신 장점, 아름다운 점을 빨리 알아보고 진심으로 찬양하는 마음의 훈련! 내가 멋있는 생을 시작하게 된 첫걸음이다.

멋진 인생의 또 다른 바탕은 자유와 사랑이다. 살아가는 데 많은 것을 소유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걱정거리를 안긴다. 살아 보니, 통속적 욕심은 스트레스이자 구속과 다름없었다. 다만, 이 나이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노년의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다행히 아직 일할 여건이 되어 하느님이 주신 마지막 보너스로 여기며 일하고 있다. 90세 넘도록 자원봉사하는 자세로 일할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노년의 멋진 삶 아닐까.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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