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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다시 쓰다, 도시 3.0] ③뉴욕에서는 하늘위도 땅밑도 도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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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창간 10주년 기획]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은 낡은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재개발·재건축과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현대인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되, 지속가능한 미래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종의 재창조 과정이다. 지구촌 곳곳의 거대 도시들은 이미 수십년에 걸쳐 이 숙제를 해왔다. 이제 한국도 이 물결 앞에 마주 섰다. 2020년 창간 10주년을 맞는 조선비즈가 이른바 도시재생의 모범생들을 직접 살펴봤다.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참고하면, 쇠락한 도시에 더 활기찬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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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chosun.com/interactive/urban/index.html?selector=life&index=0

버려진 설탕공장 명소로 탈바꿈
유산 훼손 않고 보존에 가치
고가철로·지하기지도 다시보면 ‘공간’
기부금 혜택에 슈퍼리치 지갑 열어

지난 9월 미국 뉴욕 브루클린 사우스 윌리엄스버그. 거리 곳곳에는 노후한 회색빛 건물들이 보였고 벽과 담벼락 이곳 저곳에는 그래피티(낙서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지역이 쇠락한 것은 한때 세계 최대 제당공장이던 ‘도미노설탕 공장’이 문을 닫은 2004년 부터다. 공장은 윌리엄스버그에서 이스트강(East river)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금싸라기땅에 자리잡고 있다. 헐벗은 공장의 굴뚝과 외벽은 모두 녹이 슬어 흉물처럼 보였다.

재개발을 하면 없애버려야 할 것같은 건물이지만 뉴욕은 그러지 않았다. 덕분에 생명력을 잃었던 이 공장은 지역의 상징이자 휴식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뉴욕시에 따르면 지난해 이곳에 개장한 도미노공원(Domino Park)에는 한 해동안 42만5000명이 방문했다. 뉴욕은 용도 폐기된 이 공장을 왜 보존한 채 공원으로 개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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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미국 뉴욕 브루클린 사우스 윌리엄스버그 동쪽 강변에 위치한 도미노 설탕 공장 건물 전경. /허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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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상한 폐공장이 예술품으로 탈바꿈

공장 인근을 걷다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를 따라가니 공원 한 곳에서는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공장을 등지고 잔디에 누워 이스트강을 바라보며 석양을 즐기는 연인과 가족, 아빠와 함께 미끄럼틀 타는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풍경은 한가롭고 또 아름다웠다. 흉물처럼 보였던 공장 건물이 그 순간 예술 작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문을 닫은 설탕 공장도 보존해야한다는 것은 뉴욕시의 결정이었다. 뉴욕에서는 특별한 양식으로 지어진 빌딩이나 역사가 있는 건물을 함부로 부수거나 개조할 수 없다.

뉴욕 부동산종합서비스기업 피디프로퍼티스의 데이비드 박(David Park) 이사는 "뉴욕에서는 랜드마크로 지정되면 지주나 건물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서 "현대식 건물로만 꽉 차있는 도시가 되는 것보다 이야기(story)가 있는 역사적·문화적 건물들을 보존한 도시의 가치가 더 크다는 게 뉴욕시 도시 개발의 철학"이라고 설명했다.

도미노공원은 지난 해 6월 문을 열었다. 2007년 10월 뉴욕시는 뉴욕시 강변을 하나로 연결하는 강변 잇기 사업의 일환으로 120억 달러(14조940억원)를 투입해 윌리엄스 지역을 재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곳 부지를 사들인 투트리(Two Tree)사는 2026년까지 주거, 상업·문화 시설을 완공할 예정이다. 투트리는 공장 부지에 공원을 짓고 그 주변에 저소득층 아파트를 포함한 주거공간과 오피스, 상업시설을 섞기로 했다. 도미노공원은 이 사업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강변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뉴욕에서는 강가에 건물을 지으려면 건물 앞에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강변 공원을 함께 건설해야 한다는 게 뉴욕시 당국의 정책이다. 도미노공장 일대 부지를 사들인 투트리 사는 수변에 5개 건물을 지을 계획이었다. 규정상 하나의 건물은 강과 조금 떨어뜨려 공원을 만들어야 했다. 나머지 네 개는 강에 바짝 붙여 지어도 된다. 하지만 투트리사는 5개의 모든 건물 앞에 자발적으로 직선형의 도미노파크를 지었다. 지역 전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직선형 공원이 낫다는 판단에서다.

공장 앞에는 앉을 수 있는 계단과 기대어 쉴 수 있는 라운지 의자, 수경 시설, 놀이 시설 등을 설치했다. 가뭄에 잘 견디고 관리가 쉬운 식물들도 심었다. 보통 뉴욕 공원은 민간이 만들어 뉴욕시에 기부채납하면 시가 관리를 하는데 도미노공원은 공원 소유주인 투트리가 직접 유지 관리한다.

투트리는 시민들을 위해 공원을 무료로 개방했다.설탕공장은 재개발돼 소상공인이 입주하는 몰(mall)로 변신할 예정이다. 기존 자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고 살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겠다는 게 뉴욕 윌리엄스버그의 도시재생이다.

◇ 골칫거리 철길이 새로운 관광명소로

뉴욕에서 용도 폐기된 곳을 버리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면서 새롭게 개발해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곳은 또 있다. 맨해튼에 있는 ‘하이라인 공원(Highline Park)’이다. 이곳은 이제 시민들의 문화·휴식 공간으로 자리잡았고, ‘최고의 스카이가든’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연간 약760만명이 찾는 뉴욕의 주요 관광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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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 남서쪽에 있는 고가철도가 2.33 ㎢의 직선형 공원 하이라인 공원(Highline park) 모습. 서울이 서울 중구 고가도로를 재생한 ‘서울로 7017’의 벤치마킹 사업이기도 하다. /허지윤 기자



이 철길은 애초 도심 내의 화물 수송을 위해 1930년대 초 건설됐다. 이후 자동차산업의 발달로 쓸모가 없어지자 1980년 기차 운행을 중단했다. 도심 내 골칫거리가 된 이 철도를 보존할지, 철거할지를 두고 법정 공방까지 벌이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다. 2002년 법원이 ‘보존’에 손을 들어주면서 2004년부터 공원 조성 공사가 시작됐고, 2009년 6월 공원(1구역)을 처음 개장했다.

카렌 제이콥(Karen Jacob) ‘프렌즈 오브 하이라인’ 도슨트(안내인)는 "쓰지 않는 고가철도가 방치된 채 도시 미관을 해치고 범죄의 장소가 되는 문제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를 철거하지 않았고 보존하면서 공원으로 개발하기로 했다"면서 "이제는 매주 이곳에서 사람들이 즐기고,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고 소개했다.

하이라인은 뉴욕시 소유 공공 공원이지만, 비영리단체 프렌즈 오프 하이라인이 관리와 운영, 프로그램 개발 등을 맡고 있다. 이들은 기부금으로 운영예산의 98%를 충당한다. 1,2구역 건설에 1500만달러 이상의 모금이 이뤄졌고 3구역 건설 비용 350만달러도 후원과 모금으로 마련했다. 공원에는 200명 이상의 유급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데이비드 박 뉴욕 피디프로퍼티스 이사는 "뉴욕에서는 단기 사업으로 도시재생과 랜드마크 개발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뉴욕이 세계 도시로서의 지위를 이어가려면 계속해서 인구와 자본이 유입돼야 한다"면서 "뉴욕이 도시 개발과 랜드마크 조성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오랫동안 공들이는 이유"라고 말했다.

◇ "버려진 지하공간에도 생명력을"

뉴욕이 살리려는 것은 하이라인만이 아니다. 버려진 공간이 땅 위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방치된 지하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로우라인 프로젝트’도 있다. 쥐떼가 들끓던 땅속은 앞으로 식물이 자라고 사람들이 쉬며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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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뉴욕에서 만난 제임스 램지 로우라인 총괄디자이너 겸 라드스튜디오(Raad Studio) 대표. /이신태PD



제임스 램지 로우라인 총괄디자이너는 "전차운행이 중단된 후 방치된 이 공간을 우연히 보고 녹지가 부족한 지역을 위해 지하에 공원을 조성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뉴욕 맨해튼 로이스트사이드 지역은 뉴욕에서도 공공주택의 비율이 높고, 거주민의 소득은 낮은 지역으로 꼽힌다. 그는 이곳에 방치된 윌리엄스버그 전차터미널(Williamsburg Bridge Trolley Terminal)에 주목했다.

제임스램지 총괄 디자이너는 "인구가 빠르게 늘면서 인구 밀도가 높은 동네들이 점점 늘고 있다"며 "뉴욕의 하늘 공간도 우리가 모르게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지하에 지상과 같은 공공 녹지공간을 만든다는 게 우리의 첫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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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운행이 중단된 이후 방치된 지하공간./라드스튜디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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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로우라인 프로젝트만을 추진하는 별도 회사 ‘로우라인’을 세우고,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사업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로우라인 랩(연구소)을 임시개방했다. 이 곳엔 7만명의 방문객이 몰렸다. 세계 첫 지하공원 사업인 만큼 큰 조명을 받았고 서울과 프랑스 파리 등 세계 여러 도시들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빛이 들지도 않고 어두컴컴한 지하 폐쇄공간에 푸르른 공원을 어떻게 조성할 수 있을까. 램지 총괄디저이너는 "빛이나 온도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 과제였다"며 "선포털(Sunportal)이라는 한국 회사와 함께 원격 채광 기술을 개발해 적용했다"고 말했다. 이 기술은 햇빛을 고밀도로 집광한 다음 특수 제작 렌즈를 통해 장거리로 전달하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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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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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계획대로라면 2021년 로우라인 공원을 개장해야 했지만, 개장 시점은 더 늦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뉴욕의 관계자들은 "도시재생은 늘 오랜 시간 긴 호흡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입을 모은다.

램지 총괄디자이너는 "단순히 디자인을 뚝딱 적용하는 식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랩을 운영하면서 지역 거주 학생들을 위해 교육과 연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사업을 발전시키는 과정들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 역시 예산의 대부분을 개인 기부자들의 기부와 모금으로 충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뉴욕시의 지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 랜드마크가 생기면 주변으로 상권이 개발되고, 지역 방문객이 늘면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다. 뉴욕시 당국은 이런 계산 하에 도시재생 등 재개발 사업을 허가하고 예산도 지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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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라인이 임시개방한 로우라인랩. /라드스튜디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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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 총괄디자이너는 "공공 이익을 위한 기부 형식으로 사업이 추진된다"며 "뉴욕에는 기부에 대한 세제 혜택이 있기 때문에 슈퍼리치들과 개인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역사회와 주민들의 지지와 동의가 없으면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며 "지역사회 청문회를 열어 요구사항과 견해를 듣고, 작은 하나하나 다 협의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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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뉴욕(미국)=허지윤 기자(jjy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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