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부터 독일 머문 이은정 교수 신간 '베를린, 베를린'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맞는 구동독 비밀경찰 본부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정확히 30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세계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1961년 동독 정부가 베를린에 세운 냉전의 상징인 거대한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동과 서로 양분된 베를린은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로 갈라진 지구의 축소판과 같은 도시였다. 하지만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통행을 가로막던 장벽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됐다.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이듬해에 통일을 이뤄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함께 분단된 한반도는 여전히 통일이 요원하다. 남북 지도자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베를린은 어떻게 통합이 가능했을까. 동독에 있는 섬과 같았던 서베를린 주민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1984년부터 독일에 머물며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이은정 독일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장은 신간 '베를린, 베를린'에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주민들이 끊임없이 교류하고 여러 현안을 논의했음을 강조한다.
물론 베를린에 위기가 없지는 않았다. 1958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서방 연합국이 베를린에 주둔하는 것은 불법이므로 서베를린에서 군사를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독일은 전쟁을 우려했으나, 서베를린을 공유한 미국·프랑스·영국은 소련의 통첩을 거부했다. 다행히 1959년에 미국과 소련 정상이 만나면서 군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저자는 "서베를린은 서방 연합국에는 일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방어하기 어렵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야만 하는 곳이었다"며 "서베를린 사람들은 답답하고 불안한 일상을 고집스럽게 견뎌내며 살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서베를린 주민이 처한 상황이 '차단'이 아닌 '분단'이었다고 표현한다. 일례가 동과 서를 넘나들며 일하는 근로자들이다. 동독에 거주하면서 서베를린으로 통근하는 사람은 1959년 4만명에서 1961년 5만6천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아울러 서베를린 사람이 동독에 사는 친구나 가족과 우편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가능했다. 하수도와 대중교통 같은 도시 기반시설도 동과 서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 같은 교류를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은 다름에 대한 인정이었다. 저자는 서독과 동독이 합의가 불가능하거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은 뒤로 미루고 작은 것부터 협의해 나갔다고 분석한다.
그는 "베를린은 정치적으로는 분단됐지만,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은 없었다"며 "분리되지 않은 인프라망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상호 접촉과 협업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서베를린과 동독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접근 방법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정치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사안은 배제한 채 기술적 교류에 집중했다"며 "결국 협상에 임하는 당사자들의 합리적 사고가 냉전 중에도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고 덧붙인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생각으로 통합을 이뤄낸 독일 사람들은 약 30년 만에 베를린을 유럽 문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만들었다. 베를린은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을 남겨둬 '기억을 품은 도시'가 됐다. 또 국립도서관, 예술극장, 종합대학교를 두 개 이상 둔 독특한 도시로 남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분단과 통일이 베를린을 가난하지만 섹시하고 매력적인 도시로 변모시켰다"고 평가한다. 또 한반도를 향해서는 "분단이 완전한 차단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교류 없는 분단은 곧 차단이라는 것이 베를린 사례를 통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교훈인 듯싶다.
창비. 260쪽. 1만6천원.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