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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이낙준 전문의 "난 소설 쓰는 의사…못 이룬 꿈이 글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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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의대생 이낙준은 외과를 선망했다. 삶과 죽음 간 경계에서 병마(病魔)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해, 그는 불 꺼진 수술실에서 외과 교수의 어둑한 실루엣을 봤다. 수술실에서 환자가 죽음의 '사자(使者)'를 따라 먼 길을 떠난 뒤였다. 패잔병인 의사는 수술실을 떠나지 못했다. 흐느끼는 소리만이 수술실을 메웠다. 외과 의사에게 죽음은 시인의 '소풍'도, 종교인의 '소천'도 아님을 안 건 그때가 처음이다. 외과 전문의가 지고 가야 하는 무게를 느낀 순간, 이낙준은 외과의 꿈을 포기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 이낙준은 네이버 웹소설 작가(필명 한산이가)다. 여섯 번째 작품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가 네이버 웹소설 플랫폼에서 흥행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쓰는 '외과 의사' 이야기인 셈. 외과 의사에 대한 부채의식이었을까, 경외심이었을까. 지난 1일 서울 중구 한옥마을에서 의사 이낙준, 소설가 한산이가와 함께 걸으며 물었다.

"'한산이가'는 결국 제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소회가 쌓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제 속에 담아만 둘 수 없는 수준까지 온 거죠."

외과 의사를 향한 이야기들이 세월을 두고 발효되고 임계점에 달하기 시작했을 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33세 되던 해다. "공군 공보의 시절 무인도에서 훈련하던 중 태풍이 불었어요. 그때 무심코 끄적이던 게 외과 의사 판타지 소설로 이어졌어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욕망이 컸던 것인지, 그는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작품을 쏟아냈다. '군의관 이계 가다'로 '입봉'한 후 3년 만에 작품 6편을 썼다. 모두 판타지 세계에서 외과 의사가 겪는 이야기다. 보통 웹소설 작가보다 두 배 빠른 속도. 그는 "어렸을 때 보던 '묵향' '영웅문' '소오강호' 같은 이야기 플롯이 의사로서의 경험과 만나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원천이 됐다"고 말했다. 이낙준은 의사 일을 하면서도 한 달에 약 13만자 분량의 글을 쓴다. 책 한 권 분량이다.

기존 판타지 소설이 순도 100% '픽션'이라면, 그의 소설은 팩트와 의학적 사실이 50% 이상 가미된 '팩션(팩트+픽션)'에 가깝다. 이낙준은 "의대 교수인 아내가 의학적 희귀 사례에 대해 '개인 교습'을 틈틈이 해준 덕분에 이야기의 순도를 높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역시 개인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틈틈이 논문을 읽는다. 이낙준은 동료 의사들과 함께 올바른 의학 정보를 전달하는 유튜버이기도 하다. 구독자 수는 무려 30만명. 소설가의 경쟁력이 취재라면, 그는 늘 취재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의사로서 이낙준은 작가 한산이가에 영감의 원천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야기 꾼으로서의 발목을 잡는 방해꾼이기도 하다. 허구를 써야 하는 소설가는 이따금 의학적 팩트 앞에서 좌절한다. "의사로서의 경험이 제 이야기를 한층 돋보이게 했지만, 동시에 이야기꾼으로서 한계를 규정하는 장애물이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모순적으로 느껴져요."

다작을 했지만 그를 진짜 소설가로 세간에 인식하게 한 작품은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다. 대한민국 응급의료 시스템의 비루한 현실을 고발한 외과 전문의 이국종 교수를 모티브로 삼았다. 배우 김윤석이 네이버 시리즈 TV 광고에서 작품을 낭독하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그는 작품 활동을 통해 번 돈 1000만원을 이국종 교수의 닥터헬기 사업에 기부하기로 했다. 이낙준에게 소설은 공상의 날개를 펼치는 공간이 아니라 현실을 개선하게 하는 또 다른 창구다. 이낙준은 "그에게 빚진 돈이니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 이낙준은 외과 의사의 꿈을 원 없이 이뤘다. 현실이 아닌 웹소설 영역에서일지라도 후회는 없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죽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시신들이 남긴 '다잉메시지'를 분석하는 법의학자가 새로운 목적지다. 외과 의사와 견줄 정도로 죽음과 분투하는 내과도 꿈꾼다. "펜 아니,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쓸 수 있는 게 웹소설의 장점입니다. 쓰다 보면 제가 가지 못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새로운 삶을 간접 체험하는 것, 작가에겐 최고의 행운이겠지요."

이낙준은 인터뷰를 마치고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는 여행자처럼.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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