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세종평전' 출간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재위 1418∼1450)은 새로운 왕조의 번성을 이끈 성군으로 꼽힌다. 태종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맏형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라 어진 정치를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연구자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간 '세종평전'에서 "세종은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성군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고, 항상 좋은 뜻을 가지고 일을 하고 나서 후회만 하는 무능한 임금이라고 한탄했다"고 말한다. 살아 있을 때보다 사후에 인기가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왕자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종의 삶과 통치를 분석한 책에서 치세 성공 요인으로 토론을 통한 의사결정, 사회적 약자 보호를 제시한다.
그는 "세종은 중대한 안건을 결정할 때 절대로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항상 대신들의 중론을 모으고, 합의에 이를 때까지 끝장토론을 계속했다"며 "세종은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면서 말하지 않는 신하, 다른 사람 의견에 무조건 부화뇌동하는 신하, 합의한 뒤 언행을 바꾸는 신하를 경멸했다"고 주장한다.
세종이 이처럼 신하들과 논의를 중시한 이유는 소수 의견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불만을 잠재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조세제도인 '공법'(貢法) 시행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17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공법을 만들었다.
저자는 세종이 죄수, 노비, 여성 인권 보호에 힘쓴 점을 언급하면서 "세종 시대는 요즘 말로 하면 흙수저 출신의 전성시대였다"고 강조한다.
이어 서얼 출신으로 알려진 정승 황희,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의 아들이자 노비인 장영실을 예로 들면서 "세종은 능력 있는 인재는 서얼이든, 노비든, 무사든, 귀화인이든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중용했다"고 논한다.
세종 학문의 결정체로 훈민정음 창제를 꼽은 저자는 "한글이 백성을 위한 문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며 훈민정음에 천지인 합일사상과 음양오행 사상이 반영됐고 둘째 딸 정의공주와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새로운 문자를 고안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세종은 수성(守成)의 군주임을 자처했는데, 수성은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안정을 이루는 사업"이라며 "피를 묻히지 않은 세종의 수성으로 조선 왕조는 500년 장수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한다.
"세종은 비굴한 사대주의자도 아니고 배타적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제사회와 개방적 자세로 교류해 공동 번영을 꿈꾼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였다."
경세원. 880쪽. 3만8천원.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