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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예술가 대신 ‘자영업자’로 불러달라...첫 소설집 낸 이랑 “예술도 노동, 작품을 '밥'으로 바꾸는 건 왜 안 알려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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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음악가, 작가, 만화가, 영화감독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이랑은 자신을 ‘자영업자’라고 부른다. 첫 소설집 <오리 이름 정하기>를 펴낸 이랑을 지난 22일 만났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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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33)은 싱어송라이터, 작가, 만화가, 영화감독, 페미니스트 등 수많은 타이틀을 지녔다. 정작 이랑은 자신을 ‘자영업자’라고 부른다. 예술을 노동으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예술이란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라는 요구다.

“제가 하는 여러 활동을 합치면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묶이겠지만, 직업으로 인정을 잘 안 해줘요. ‘와서 좀 놀다가 가’라는 식으로 공연 섭외를 한다던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사람의 재능을 공짜로 소비해도 된다는 인식이 있어요. ‘자영업자’라고 소개하면 ‘아, 돈을 줘야 하는구나’라고 인식하지 않을까 해서 쓰기 시작한 이름이에요.”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즉석 경매에 부친 사건은 이랑을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트로피는 50만원에 팔렸다. 이랑은 “예술가를 직업인으로서 인정해주지 않는 가운데 버둥버둥 50만원을 벌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고 말했다. 이랑은 지난달 발간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잡지에 “나는 자영업자입니다”란 글을 썼다. ‘이메일 쓰는 법, 계약서 쓸 때 주의사항, 세금신고 및 계산법’ 등 예술가로 ‘생존’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후배들에게 전했다.

“실제로 과 선배가 돈이 없어서 굶어 죽었어요. 그후 학교에서 취한 조치가 심리상담센터를 만드는 거였어요. 심리상담센터도 필요하지만 작품들을 밥으로 바꿀 수 있는 스킬들을 알려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처음 의료보험료가 나왔을 때 당황했거든요. 세금 등의 문제를 저 혼자 싸워서 조정해나가야 했어요. 이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죠.”

이랑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투적으로 ‘예술의 대가‘와 ‘예술가의 생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영업자’ 이랑이 이번에는 첫 소설집을 펴냈다. 짧은 소설, 극본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엮은 <오리이름 정하기>(위즈덤하우스)를 펴낸 이랑을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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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작가, 만화가, 영화감독 둥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이랑 작가.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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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은 노래 ‘신의 놀이’에서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때로는 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시나요”라고 물었다. 표제작 ‘오리이름 정하기’엔 다혈질에 괴팍한 성격의 주님과 그의 비위를 맞추는 예수·천사 등에 의해 창조가 이뤄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삶이란 게 이렇게 마구 내던져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묻는 ‘신의 노래’의 연장선상이다. 식인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계속 사람으로 있으려고 하니까 힘든 거 아니야?”라며 차라리 좀비가 되길 택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자 여성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며 이상한 섹스코미디를 들고 나오는 남성 제작자 등 이야기가 다채롭다. 삶과 예술, 페미니즘에 대한 맛깔나는 이야기들은 ‘이야기 제조업자’ 이랑의 면모를 만끽하게 해준다.

“학교 다닐 때 쓴 글이나 웹드라마 감독을 하면서 쓴 글들을 보면 주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평소 드라마를 봐도 엑스트라들만 계속 보고 있어요. 카메라를 돌렸을 때 이 사람들 이야기가 분명 1부터 100까지 있을텐데 그걸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이든 영화든 노래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하철 자살 사고가 일어나 촬영 현장에 늦은 보조출연자가 어색한 좀비로 분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스타가 되는 이야기를 다룬 ‘똥손 좀비’는 주변부의 소외된 보조출연자의 삶과 상업적으로 굴러가는 영화판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이랑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시장 추격신을 가장 싫어한다. 백인 남성 주인공이 아시아 어딘가의 시장을 전력질주하면서 다 때려 부수는데, 그건 누가 보상해주나”라고 덧붙였다.



책엔 2019년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직면한 현실도 가감없이 드러난다. 성별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 윗집 남자에게 잘못 배달된 택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이랑은 “페미니즘을 알기 이전과 이후의 내가 다르다”고 말했다.

“영화과를 나와 영상일을 계속 해왔어요. 영상 현장은 그야말로 ‘남성 밭’이고 살아남기 위해 명예 남성으로 살았어요. 거칠고 야한 얘기도 일부러 더 세게 하면서 ‘나도 너희랑 동지’라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죠. 그런데 그게 저를 보호하지도 않았고 강하게 하지도 않았어요. 외롭고 슬프게 했던 일이었고, 저에게 화살로 되돌아와 상처를 낸 거죠. 페미니즘을 접하고 여성 친구들이 먼저 자기검열과 반성을 시작했어요. 다 같이 반성해야 하는데 왜 여성들만 하고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그런 시간을 겪고 나서는 예전처럼 할 수 없었어요. 답을 찾지 못해 영상일은 2~3년째 쉬고 있어요.”

책엔 “여자들이 판을 쳐야 하는 시대”라며 섹스코미디를 제작하려는 남성 제작자와 당황스런 대화를 나누는 시나리오 작가 이야기가 나온다. 이랑은 “실제 주변에 있었던 이야기”라며 “페미니즘이 나온 이후에 영화판에 있는 남자들이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든다. 사실 남성 중심적 현장은 똑같은데 거기에 여자 감독만 얼굴마담으로 꽂아넣는거다. 이건 변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랑은 여성 예술가들이 안전하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도 말했다. 최근 가수 설리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직업을 선택하고 그걸로 잘 살고 싶었을 뿐인데, 계속 짐을 지우고 사람들의 공격에도 보호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듯한 이랑이지만 실은 “겁에 질려있다”고 고백한다. 이랑은 “‘안전하게 떠들 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며 “개인적으로 ‘정신승리’하는 법도 있지만 시스템적으로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이야기를 공감하고 들어줄 독자들도 계속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랑은 지난 5월부터 암 투병중인 친구를 돕기 위해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라는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6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이뤄진 프로젝트는 “예술가들끼리 서로 도울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30인의 작가가 한 달에 한 편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전체 인세의 1%를 받는다. 나머지는 치료비로 후원한다.

“친구가 프리랜서로 자기 몸을 갈아넣으면서 자지 않고 쉬지 않고 일하다 암에 걸렸어요. 큰 병에는 큰 돈이 들어가는데 큰 돈이 마련되지 않은 이 생태계 안에서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다 마련한 프로젝트에요. 이걸 계기로 작가들끼리 도울 수 있는 흐름이 생기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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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은 지난달 한국예술종합학교 잡지에 기고한 글 ‘나는 자영업자입니다’에서 예술가로 생존하는데 필요한 지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랑 인스타그램


이랑이 자신을 ‘자영업자’로 부르는 이유는 ‘예술가’란 말에 덧씌워진 오해와도 관련 있다. 이랑은 “예술가란 말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하나는 예술을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무슨 ‘개짓거리’를 해도 쉽게 사회적으로 용서해주는 면”이라고 지적했다.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예술가들의 성폭력에 대해서 “그나마 유명하니까 밝혀진 몇 명의 사례일 뿐이지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사례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영업자’ 이랑의 일과는 단순하다. “작업실에 가서 데스크에 앉아서 일하고 집에 와서 잠을 자고 다시 일하러 가요. 쉬는 날이 거의 없는데, 이러다 암에 걸릴 것 같아 일주일에 하루는 쉬려고 해요.”

이랑이 가장 많이 하는 업무는 ‘메일 관리’,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엑셀’이다. 그는 “메일 확인과 답장에 시간 투자를 너무 많이 해서 ‘메일 관리자’를 고용했어요. 지방에서 지병으로 밖에서 일하기 힘든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에게 하루 2시간 정도 이메일을 관리해주는 걸 부탁했다”고 말했다. 창작은 “이메일 관리하는 중간 중간에 짧은 메모들을 하고 한꺼번에 정리하는 방식으로 바꿨다”며 “시나리오도 구글문서를 이용해 쓰면 편하다”고 말했다.

이랑은 ‘자영업자’로서 시행착오와 싸우며 얻은 노하우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에세이도 ‘돈’에 대한 것이다. “프리랜서 작가들의 안전장치 시스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프리랜서 노동환경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그렇게 겨우 번 돈을 세금조정하는 법을 몰라서 자기가 번 것보다 더 내는 사람들도 너무 많아요.”

이랑은 함께 가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앞서가는 사람이다. 겁이 날지라도, 함께 가면 더 안전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런 그도 최근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감독님이 서른 여덟인데 첫 장편 영화예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힘들게 보냈을지 짐작이 가고, 존경스러웠어요. <벌새>를 보고 의지와 힘이 생겼어요. 저는 30대 중반부터 영화를 할 생각입니다. 영화인의 삶으로 진입하는 순간 금전적 문제가 가장 클 것이기 때문에 대비하고 있어요. 엑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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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작가, 만화가, 영화감독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이랑.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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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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