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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순찰차 속에도 ‘사람’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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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계 입소문 난 3년차 파출소 여성 경찰 에세이

현장의 혹독한 감정노동과 범죄자들 당당한 눈빛 ‘생생’


한겨레

경찰관속으로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

원도 지음/이후진프레스·1만4000원

‘젊은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를 믿노라!’

갓 경찰에 합격해 중앙경찰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이 현수막이 주는 문장이 주는 벅찬 감격이 “내가 이러려고 경찰이 됐을까” 하는 자괴감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술 취한 민원인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두들겨 맞고 얼굴에 침을 맞고 욕설을 듣고, 그들이 순찰차에 남겨놓은 토사물과 똥오줌을 치워야 했다. 하지만 술 취한 사람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은 술 취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뜬금없이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와 “니네 월급은 내가 주는 거야” “니네가 하는 일이 뭐냐!”며 커피를 타라고 지시하고 차가 너무 밀려서 짜증이 난다고, 단골 술집이 문을 안 열었는데 사장에게 연락해서 문을 열게 해달라고, 심지어 동성애자를 봤다며 출동하라고 명령한다. 중앙선을 침범하는 트럭을 단속했다가 기사에게 “젊은 년이 늙은 사람 단속해서 복 받겠다”는 소리를 듣고선 참담했지만 기사들에게 침까지 맞은 선배 앞에선 하소연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모멸은, 잔혹함과 처참함이 흥건한 범죄 현장과 번뜩이는 눈빛의 당당한 범죄자들을 마주할 때 치미는 인간에 대한 환멸에 비하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극한 감정노동의 직업 세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일까, 양심이란 무엇일까, 아 무엇보다 과연 나는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질문과 인내의 시험대다. <경찰관속으로>는 3년차 파출소 여성 경찰이 점점 간당간당해져 가는 자신의 임계점을 지키기 위해 쓴 편지 형식의 에세이다. 뜨거운 정의감은 순식간에 도망가고 비겁함과 무기력함에 압도당해가는 자신을 붙들기 위한 치열한 성찰이자, 현장 경찰들이 ‘매뉴얼의 포로’가 되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해나가고자 하는 발버둥이다.

한겨레

제목은 일부러 띄어쓰기하지 않아서 ‘경찰관 속으로’ 혹은 ‘경찰, 관 속으로’ 등 이중적으로 읽히게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바로 경찰이 있기 때문이다. 타살이건 자살이건, 억울한 죽음이건 안타까운 죽음이건, 몸을 던져 죽건 목을 매달아 죽건, 그 모든 현장에 경찰은 가장 먼저 ‘저승사자’처럼 당도해야 한다. 동료 경찰이 죽어 나가는 것도 수없이 봐야 한다. 자살 기도자를 구하려 아파트 창문 밖 난간으로 이동하다 추락해 사망한 경찰, 철길 위에 누워 있던 지적장애인을 구하려다 열차에 치여 숨진 경찰, 피의자를 제지하려다 황산 테러를 당해 얼굴과 목에 3도 화상을 입은 경찰, 만취자가 휘두른 폭력에 안면이 함몰된 경찰…. 숱한 죽음의 목격은 영혼에 서서히 생채기를 낸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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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독립출판물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언론에 소개된 적도 없이 독립서점 30여곳에서만 유통되었지만,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단숨에 5천부 넘게 팔렸다.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돼 대형 서점에 유통되는 책들도 2천~3천부 팔리면 ‘선방했다’는 평을 받는 분위기에서 이는 놀라운 성과다. 최근 발간된 개정판은 10편의 글이 더 추가되었으며, 이제는 일반 서점과 온라인 서점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저자는, 동네를 지나가는 순찰차를 보거나 문득 마주친 경찰관을 보면서 저 사람이 이 책을 쓴 게 아닐까, 하는 호기심으로 한 번 더 쳐다보도록 만들고 싶어서 인적사항도 거의 밝히지 않은 필명으로 책을 펴냈고,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사양했다. 이런 그의 익명 의도는 성공할 것 같다. 그렇다! 파출소에도 순찰차 안에도 사람이 있었던 거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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