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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만물상] '정치 풍자' 내로남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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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미 대선 때 CBS방송에서 토크쇼 진행자 데이비드 레터맨이 이죽거렸다. "알고 보면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은 공통점이 많다. (…) 한 사람은 결혼 생활에 문제가 많은 '뻣뻣남'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결혼 생활에 문제가 많은 남자와 사는 '뻣뻣녀'라는 거죠." 뉴욕 시장을 지낸 줄리아니가 세 번 결혼한 것, 힐러리가 '성추문' 남편과 사는 걸 비꼬았다. NBC의 간판 코미디언 제이 레노는 틈만 나면 빌 클린턴의 불륜 스캔들을 입에 올렸다. 시청자는 배꼽을 잡았다. 지지자들은 속이 불편했겠지만 '프로그램 폐지' 압력을 가했다는 얘기는 없었다.

▶중국에는 정치 풍자가 아예 없다. 시진핑 주석을 만화 '곰돌이 푸'에 비유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 정부를 풍자하다 퇴출당한 미국 TV 만화 방송은 소셜미디어에 글을 남겼다. "중국 검열을 환영한다. 시 주석은 곰돌이 푸를 전혀 닮지 않았다. 이제 됐냐?" 이 에피소드는 정치 풍자가 민주주의와 독재를 가르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걸 알려준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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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정치 풍자 코미디가 첫선을 보인 건 1986년 김형곤씨가 열연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다. 이 프로는 정권 서슬에 방송 중단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민주화 이후엔 5공 비리 청문회로 드러난 부정도 신랄하게 풍자했다. 개그맨 최병서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같은 '핵인싸'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맘대로 복사하며 인기를 얻었다.

▶개그우먼 김영희씨가 최근 팟캐스트 방송을 접었다. 다른 출연진과 '금수저'를 주제로 농담을 주고받다 "조국 딸 느낌이 나요, 박탈감을 느껴요"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더 신중하겠다"고 했지만 친문 세력의 집중포화를 견디지 못했다. 고교생 병리학 논문 제1저자와 황금 스펙, '무조건 장학금' 이상의 금수저가 어디 있다고 이 정도 말도 못하나. 반면 '조국 수호' 집회에 나온 다른 개그맨은 '개념 연예인' 반열에 올랐다. "이제는 조국이 아니면 안 되게 됐다"고 외쳤다 한다.

▶정치 풍자가 '풍자'가 되려면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편이 하면 '풍자'고 상대편이 하면 '인권유린'이라는 기준은 내로남불이다. 기괴한 나체를 그려 여성 정치인을 모욕할 때는 열광하더니 '조국 딸 느낌'이라는 한마디를 했다고 방송을 접게 한다면 독재와 다름없다.

[안용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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