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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햇빛은 유리창을 잃고…' AI가 쓴 이 시는 예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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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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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방영된 JTBC '속사정 쌀롱' 1화 캡쳐 화면. [사진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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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방영된 JTBC ‘속사정 쌀롱’ 1화의 주제는 ‘후광 효과’였다. 말인즉, 같은 그림이라도 걸려 있는 위치에 따라 사람들이 가치를 다르게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날 방송에 등장한 그림의 정체였다. 족히 몇백만 원 정도는 할 것 같다는 평가를 받은 이 그림은 다름 아닌 개그맨 장동민이 그린 것이었다.



전범 옹호자의 노벨상 수상 논란



이야기를 잠깐 다른 쪽으로 돌려 본다. 지난 10일 스웨덴 한림원은 희곡작가 페터 한트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동안 너무 ‘모호한,’ ‘유럽인 중심의,’ ‘남성 중심의,’ ‘실험적인,’ ‘별로인’ 작가를 선정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노벨 문학상은 이로써 새로운 논란의 대상이 됐다.

현재 국제사회는 한림원에 묻고 있다. 과연 전범 옹호자에게 최고 문학상을 줘도 되는가? 여기서 말하는 ‘전범’이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이자 무슬림 혐오주의자였던 유고슬라비아의 전 대통령, 8000명 이상이 사망한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사건(1995)의 책임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1941~2006년)를 말한다. 한트케는 90년대부터 학살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고, 밀로셰비치와의 친분을 이어온 바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이번 논란에 대해 ‘미학’을 들먹이며 ‘문학적 가치와 정치적 문제의 균형을 찾는 것은 한림원의 의무가 아니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 말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정치와 미학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 랑시에르(1940~현재)의 말에 더 수긍하게 되는 것은 비단 나뿐인가.

다시 ‘장동민의 그림’ 얘기로 돌아가 보자. 누가 그렸느냐의 문제는 미술에서 왜 중요한 것일까. 어떤 사람은 미술계가 지나치게 작가의 명성에 많은 의미를 둔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그림 자체에 미적 가치가 있느냐보다 유명한 사람이 그렸느냐에 더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본질에의 접근’이라는 시도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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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실 때 단순히 맛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이미지와 분위기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소비하듯이, 그림 역시 그 자체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한 미술적 스토리가 필요하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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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종종 ‘커피 브랜드의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얘기로 회자하는 이 본질에 대한 집착은, 말하자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꼴이다. 커피의 소비란 커피 맛뿐 아니라 매장의 분위기, 브랜드의 이미지 등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지, 단순히 맛에 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장동민의 그림에 높은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에 미적인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장동민이라는 개인에게 미술과 관련된 아름다운 드라마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바다 바람에 비

하늘을 나는 새들

밝고 차분한 밤

밝은 태양

지금 하늘에 간다

평온한 마음

사나운 북풍

새로운 세상을 찾았을 때

-샤오빙(小氷)), ‘바다 바람의 비(雨过海风一阵阵)’ 전문.

2017년 중국에서 ‘햇빛은 유리창을 잃고(阳光失了玻璃窗, 국내 미출간)’라는 제목의 시집이 발간됐다. 저자의 이름은 샤오빙.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인공지능 챗봇’이다. 즉, ‘햇빛은…’은 세계최초로 AI가 쓴 시집인 셈. 수록작품 중 ‘바다 바람의 비’라는 위의 시는 얼핏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한다. ‘비’ ‘바다’ ‘하늘’ ‘태양’ 등 자연시의 대표적인 시어들을 한껏 늘어놓은 까닭이다. 하지만 이 시에는 적어도 문학적으로는 생각해 볼 가치가 없다. 시와 시를 쓴 자의 마음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동민 그림이 작품이 아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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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그저 캔버스 위의 물감이 아닌 그걸 둘러싼 화가의 배경과 이야기이다.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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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본다는 것은 캔버스 위에 발라진 물감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본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붓을 잡은 화가의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장동민의 그림이 (의외로) 심미안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한들 그것을 의미 있는 미술작품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운 이유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과 그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을 본다는 것이지, 소위 ‘있어 보이는’ 단어의 나열을 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술의 첫째 조건은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이란 작품의 미적 감각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작품으로 구현되기 전 예술가가 지녔던 생각까지 아름다워야 예술이다. 그러니 생각은 없고 작품만 있다면 기술(奇術)이라고 부를 일이다. 한편 창작자의 생각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데 작품은 어설프게 아름다움을 흉내 내고 있다면, 마땅히 사술(邪術)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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