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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필동정담] 겸허한 모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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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에는 길에서 죽은 쥐와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오싹해지는 경험이다. 제법 거리를 두고 발견했을 때는 눈을 다른 데로 두고 멀찌감치 돌아가곤 했다. 도시 위생이 좋아진 탓인지 요즘은 죽은 쥐를 보기 어렵다. 대신 신문지상이나 인터넷에서 몇몇 얼굴과 이름을 맞닥뜨릴 때 비슷한 경험을 한다. 제목만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건너뛰는 것이다. 기사까지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업적 필요에서 어쩔 수 없이 읽게 될 때는 그야말로 고역이다.

옳은 말을 품격 없이 하기로 유명했던 어느 유튜버는 요사이 '아무말' 공장장이란 비아냥을 듣고 있다. 조국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그의 아무말을 피해서 인터넷 뉴스를 체크하기가 힘들었다. 마주칠 때마다 오싹오싹했다. 급기야 그의 유튜브 방송은 여기자 대상 성희롱 논란에까지 휩싸였다. 이 유튜버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이번에 처음 봤다. 아무말의 업보다. 이 지식인은 썼다 하면 순위권에 오르는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수십 년 전 처녀작을 빼놓고는 읽지 않았는데 오랜 세월 그의 언어가 모국어 심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

역시 베스트셀러 제조기인 한 여류소설가는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더 노골적으로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 밉지? 약오르지?' 하는 것 같다. 미운 건 모르겠고 이상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녀의 인세 수입에 십원 한 장 보태주지 못했지만 그 많은 베스트셀러가 모국어에 미친 영향이 역시 조금 걱정된다.

내전 같았던 조국 사태가 끝나고 나니 가을이 무르익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기도'에서 모국어의 겸허함을 이처럼 울림 깊게 보여주고 있다. 유튜버도, 여류작가도 인생의 가을로 접어드는 나이다. 이제는 좀 겸허해져도 되지 않을까.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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