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6 (일)

[충무로에서] 소부장과 老박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일찍 은퇴하지 마라(Don't retire early)." 지난주 노벨 화학상이 리튬이온 배터리를 연구한 과학자 3인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 BBC 방송은 수상자 중 한 명인 존 구디너프 교수에게 달려갔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 무기화학 연구실장을 지내면서 리튬이온 전지의 설계를 혁신했지만 현재는 옥스퍼드대를 떠나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그가 영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간 이유는 일하고 싶어서다. 옥스퍼드대에선 정년이 65세지만 미국은 정년이 없다. 올해 97세인 그는 지금도 연구실에 나가며 대학원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장신이지만 허리가 굽어서 키가 줄어버린 그는 금속으로 된 네 발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다니는 모습이었다. BBC가 그에게 '노벨상 수상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일찍 은퇴하지 말고 연구에 매진하라"며 환하게 웃었다.

또 다른 수상자 요시노 아키라 아사히카세이 명예펠로는 올해 71세인데 '직장인 노벨상'이라는 신화를 썼다. 요시노 박사는 일본 화학기업 아사히카세이에 1972년 입사해 배터리 기술개발 담당부장, 이온 2차전지 사업 추진실장 등을 거치면서 리튬이온 전지 상업화에 성공한 인물이다. 박사 학위는 2005년에야 취득했다. 그는 노벨상 수상 직후 인터뷰에서 "1981년 리튬이온 전지에 대한 기초 연구를 시작해 실제 개발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며 "그렇게 나온 전지는 3년간 전혀 팔리지 않았지만 연구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음극에 사용할 탄소의 시험, 양극을 만드는 방법 연구, 가장 적합한 전해질 탐구 등을 40년간 묵묵하게 해낸 결과가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고 한국이 맞대응하면서 정부가 부산하게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일본 측 보복에 대한 대응 예산이 포함된 추경이 집행됐고, 피해 기업들에 대출 만기 연장 등 금융 지원도 나왔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에 매년 1조원 이상 예산을 투입한다는 대책도 나왔다. 다급한 불을 끄기 위한 긴급 처방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소부장 시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이런 대책만으로 쉽게 국산화가 가능했던 것이라면 기업들이 그동안 안 했을 리 없다. 문제는 국가의 과학기술 역량, 즉 시간이다. 과감한 정책의 전환 없이 정부의 임기응변 조치로 소부장 육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정년 후에도 30년을 연구에 매진한 구디너프 교수, 전혀 팔리지 않았던 리튬이온 전지 연구를 40년간 해온 요시노 박사 등은 인생을 걸고 리튬이온 배터리를 만들어냈다. 소부장 시대 노(老)교수들이 주는 교훈이다.

[산업부 = 한예경 차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