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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이어령 “펜데레츠키 교향곡 5번은 한국 위한 진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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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장관 때 ‘한국교향곡’ 의뢰

‘새야새야 …’ 모티브로 92년 초연

“그는 따뜻한 휴머니스트 예술가 …

곡 의뢰 받고 남대문시장 다녀와”

서울국제음악제 오는 펜데레츠키

26일엔 ‘누가 수난곡’ 한국 초연

중앙일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장관 시절 남긴 것 중 자랑할만 한 게 펜데레츠키의 교향곡 5번 ‘한국’“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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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작곡가 크시스토프 펜데레츠키(86)가 20세기 중반의 주요 작곡가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이었다. 그가 작곡한 ‘히로시마를 위한 애가(threnody)’의 반향은 컸다. 전통적 음악의 요소가 사라진 이 음악에서 펜데레츠키는 현악기 52대가 소리를 불규칙한 덩어리로 만들어 내도록 지시했다. 소음일 뿐인 불협화음은 듣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끔찍하다. 제목과 상관없이 음악 자체로도 혁신적인 작품으로, 현존 작곡가로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펜데레츠키의 출세작이다.

그래미상 5회, 에미상 2회,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한 펜데레츠키는 이달 26일 한국에서 또 다른 역사적 작품을 직접 지휘한다. 폴란드 태생의 그가 겪은 전쟁과 비인간적 상황을 그린 ‘성 누가 수난곡’이다. 66년에 만들어진 이 곡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전쟁 후 폴란드 내의 이념 대결 등을 종교적 텍스트 위에서 그려냈다. 지난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개막 공연에서 현대적 의미로 다시 연주됐고 이번이 한국 초연이다.

펜데레츠키의 교향곡 5번 제목은 ‘한국’이다. 91년 위촉을 받아 이듬해 8월 14일 한국에서 초연됐다. 이때 펜데레츠키에게 한국 교향곡을 위촉한 이가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85)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이다. 이 이사장은 펜데레츠키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휴머니스트 예술가”라고 했다. 이 이사장이 10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펜데레츠키와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했다.

Q : 펜데레츠키의 교향곡 8곡 중 5번째인 ‘한국’ 교향곡을 위촉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A : “문화부 장관 시절 통일 해법을 정치·경제에서 찾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어요. 해방 전, 분단 이전에 우리 민족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집단 기억이 중요해요. 남과 북이 집단 기억을 가진 500~600년에 비하면 분단의 시대는 얼마 안 되거든요. 공유하는 문화를 확인하고 눈물의 원천을 봐야죠. 먼저 울어야 한다, 한을 풀고 공통으로 느낀 원천을 알아야 한다고 봤어요. 그런데 집단 공통의 기억 중 음악의 비중이 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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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데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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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남과 북의 오래된 노래 대신 펜데레츠키에게 새롭게 교향곡을 쓰도록 했습니다.

A : “가사가 있으면 안 된다고 봤어요. 언어성 때문에 이념 충돌이 생기거든요. 남과 북 모두와 관계가 없는 제3국에서 나와야 했어요.”

Q : 어떤 음악을 상상했습니까.

A : “일본 강점기에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고, 비적(匪賊) 누명을 쓰고 죽었는데 이 사람들은 묘비명도 묘목도 없어요. 영혼을 달래주는 진혼곡이 필요했습니다. 이 진혼곡으로 남북한이 광복절을 함께 지내는 구상을 했습니다.”

Q : 진혼곡에서 펜데레츠키로 연결된 것이네요.

A : “우리는 민간에는 진혼이 있어요. 씻김굿 같은 것이 있지만 다른 쪽으로는 진혼곡이 발달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레퀴엠을 찾아보다 주위의 추천으로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를 위한 애가’를 듣게 됐어요.”

Q : 굉장히 전위적이고 듣기 힘든 음악인데요.

A : “그 곡을 듣고 이럴 수는 없다 싶었어요. 펜데레츠키의 나라인 폴란드가, 또 동유럽이 누구에게 당했나요, 러시아에게 당했지 않나요. 그런데 또 다른 가해자인 일본을 위해 음악을 쓰고 한국을 위해서는 안 쓴다면 음악가로서 안된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어요. 한국을 위한 진혼곡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펜데레츠키와 같은 세계적 음악가가 한국의 희생자를 위해 곡을 써준다면 세계적으로 우리의 이야기가 퍼질 것 아니냐 싶었습니다.”

Q : 교향곡 ‘한국’에서 ‘새야새야 파랑새야’가 모티브로 반복됩니다. 이사장님의 제안으로 사용된 것인가요.

A : “펜데레츠키를 한국으로 초청해 부부동반으로 한식을 나눠 먹었어요. 그러면서 진혼곡을 정식으로 부탁했죠. 한국적인 여러 음악을 들어볼 수 있도록 카세트테이프를 줬는데, 그걸 듣는 대신 남대문 시장으로 갔더라고요. 거기에서 움직이는 사람, 그때의 색채, 분위기를 본 거죠.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어떻게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동학으로 시작해 죽어도 죽은 줄, 피 흘려도 피 흘린 줄 몰랐던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담아냈습니다.”

Q : 당시 광복절에 북한과 함께 하는 ‘한국’ 교향곡 연주는 무산됐죠. 대신 서울에서 초연이 있었습니다.

A : “저는 곧 문화부 장관을 그만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초연 무대도 못 봤습니다. 그때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위촉한 것에 대해 말이 많았어요. 하지만 아이디어가 우리 것이었으니 어느 나라에서 해도 우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지배하고 아킬레스라는 영웅의 무덤 앞에서 통곡했다고 합니다. 부하들이 왜 이렇게 우느냐 하자 ‘아킬레스는 전 세계에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트로이 성도 함락을 못 시켰던 인물이다. 다만 호메로스가 있어서 무용담이 퍼진 것이다. 나는 유럽을 정복하고도 호메로스가 없어서 퍼트리지를 못했다’고 했어요. 지금 한국도 호메로스가 있어야 해요. 우리 힘이 모자라면 세계의 훌륭한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Q : 펜데레츠키는 이번에도 인간의 아픔에 대한 곡을 들고 한국에 옵니다. 21세기에 새로운 위촉을 한다면 어떤 작품을 할 것 같습니까.

A : “청산별곡을 부탁하고 싶어요. 참 아름다운 노래에요. 머루랑 다래랑 먹겠다는 건 농업시대의 사람이 채집 시대로 돌아가겠다는 뜻이거든요. 청산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신 머루와 다래를 따 먹겠다는 거거든요. 채집민이어야 하는데 농경민이 되고 그 다음에 산업화가 돼서 지금 디스크, 류머티즘, 비만증이 오잖아요. 아름다운 청산별곡을 세계적 작곡가가 만들면 세계의 노래가 될 거에요.”

펜데레츠키의 ‘누가 수난곡’ 한국 초연은 26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KBS교향악단과 3개의 합창단, 소년 합창단, 독창자 3인과 내레이터가 출연하는 두시간짜리 곡이다. 22일 개막해 다음 달 8일 끝나는 서울국제음악제의 공연 중 하나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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