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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기자칼럼]성평등과 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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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스웨덴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스웨덴 예테보리도서전에서는 그랬다. 지난달 26일 예테보리국제도서전 개막식에서 한국 측 연사는 모두 남성이었다. 김용삼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장, 현기영 소설가 등이 무대에 올랐다.

경향신문

스웨덴은? 아만드 린드 문화부 장관, 프리다 에드만 도서전 디렉터, 아넬리 레딘 예테보리 시장 등 무대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39세 여성인 아만다 린드 장관은 인상적이다 못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출산한 지 6주밖에 되지 않은 린드 장관이 유모차를 끌거나 아기에게 수유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개막식날 저녁에 열린 리셉션에선 아넬리 레딘 시장이 축사를 했다. 축사 후 한국 작가와 기자들이 있는 테이블에서 그는 “스웨덴은 성평등을 많이 이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불평등이 남아 있다. 여성은 아직 남성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민자와 난민을 언급하며 “스웨덴의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한 삶을 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레딘 시장에게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았던 게 있다면 어깨에 두른 ‘금사슬’이었다. 예테보리의 문장이 새겨진 금 휘장을 거대한 목걸이처럼 두르고 있었는데, “남성용으로 제작된 것이라 크고 무겁다”고 말했다.

성평등 지수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나라 스웨덴에서 열린 예테보리도서전의 주제는 ‘성평등(Gender Equality)’과 ‘미디어 정보 해독력’이었다. 주빈국인 한국관 주제는 ‘인간과 인간성(Human and Humanity)’이었는데, 나는 조금 의아했다. 성평등에 대한 요구는 근 몇년간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목소리였고 한국 문학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100만부가 넘게 팔렸고, 페미니즘과 퀴어 등 여성과 소수자를 다룬 문학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폭로에 이어 미투 운동이 벌어졌고, 이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 한국 문학과 문단엔 적잖은 변화가 일었다. 한국 문학은 ‘성평등’에 대해 누구보다 뜨겁고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았을까?

도서전에서 열린 ‘한국 문학의 페미니즘과 그 미래’라는 세미나엔 김금희 소설가와 김동식 문학평론가가 참여했다. 김동식 평론가는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 변화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성 평론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어쩔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우리는 그 자리에 더 적합한 여성 평론가를 갖고 있지 않은가. 한편 세미나 참여자들은 ‘#비혼’ 운동과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가수 아이린에 대해 질문할 만큼 한국 상황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인간과 인간성’이란 주제에 대해 주최 측은 “‘성평등’을 인간 조건의 문제로 끌어안고자 했다” “도서전 주제인 성평등보다 ‘인간과 인간성’이란 주제로 더 근본적인 걸 건드렸다”라고 설명했다. ‘인간성’이란 주제가 포괄적일 순 있지만 지금 어떤 ‘인간’이 차별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진 못한다. ‘인간’이란 범주에 속하지 못하고 지워진 존재를 가시화하는 과정이 인권 확장의 역사였고, 지금 ‘젠더’는 ‘인간’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주최 측은 주빈국으로서 한국 문학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평등’에 관해 분출하고 있는 한국 문학의 열기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도서전에 참여한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휴먼(Human)은 그냥 맨(man)이야.” 한국 문학의 ‘주류’라 불리는 이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다면 이 말에 있지 않을까. 적어도 예테보리도서전에서 우리는 과감히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춤하는 제스처를 보여주고 말았다.

이영경 |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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