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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이굴기의 꽃산 꽃글]고창 어느 논두렁의 민구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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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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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출신의 매제가 처음 고향에 와서 여동생에게 말했다고 한다. 와, 앞산 뒷산 사이에 장대를 걸쳐놓아도 되겠네. 드넓은 호남 벌판을 끼고 살다가 경상도 산간벽지의 좁은 동네를 보고 재치있게 마음의 한 자락을 질러본 셈이겠다. 지평선 축제가 열리는 김제, 정읍, 부안, 고창의 곡창지대를 달리는데 좌우가 다 들판이다. 뜨내기 나그네의 마음마저 부자로 만들어주면서 나락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오늘은 논에 사는 멸종위기종의 식물을 조사하는 데 따라나섰다. 멀리에서 내려다보는 산이 들으면 참 가소로운 일이겠지만 한때 국회의원이라면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런 줄이야 잘 모르겠다만 하나 분명한 건 있다. 국회의원이야 또 뽑으면 되지만 한번 사라진 식물은 설령 온 인류가 다 들고일어난다 해도 돌이킬 수가 없는 법이다.

방아깨비와 그 동무들이 후드득 먼저 반기는 논두렁에 섰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옆에서 논두렁도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한때 이곳은 내 좋은 놀이터였다. 이 좁고 긴 길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졌던가. 논두렁은 작은 밭이기도 했다. 논에 나온 쌀로 밥을 짓는다면 논두렁에서 나온 콩은 반찬으로 흡족했다. 어머니는 모내기 끝난 뒤 그 자투리 밭도 그냥 묵히는 게 허전했던 것이다.

나는 문득 몹시 놀란다. 그저 지나다니기만 했던 논두렁에 이리도 많은 종류의 식물이 살고 있다니! 더구나 하나하나 그 까무러칠 법한 이름이라니! 이 황홀한 학교에서 오늘 얼굴을 맞댄 식물을 호명해 본다. 밭뚝외풀, 금방동사니, 황새냉이, 둥근하늘지기, 여뀌바늘. 그저 입에 넣고 중얼거리기만 해도 입안에 까끌한 문명이 건설되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듯한 자태가 있으니 민구와말이다. ‘습지에 나는 다년생 수초, 물 위의 잎은 5~6장씩 윤생, 털이 없으며, 깃 모양으로 갈라지고, 길이 1~1.5㎝, 너비 3~5㎜, 잎자루는 없음, 꽃은 홍자색, 화관은 통 모양, 끝이 다소 입술 모양’(이영노, <한국식물도감>). 이러니 이들의 응원으로 자란 쌀밥 먹을 때마다 어찌 특별한 소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민구와말, 현삼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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