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식 대한한돈협회장은 14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이같이 말했다. 파주·김포에 이어 연천까지 사육돈을 전량 살처분한다고 정부가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하 회장은 “발생 농가 간의 역학관계가 모호해 유일하게 의심되는 매개체는 멧돼지”라며 “양돈업계는 1년 전부터 ASF 남하를 염두에 두고 멧돼지 개체 수를 3분의 1로 줄여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고 호소했다. 지난 5월 북한에서 ASF가 발생했을 때라도 대비책을 내놔야 했는데, 정부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나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 사이 살처분 대상 돼지는 15만 마리를 넘어섰다.
정부는 13일 ‘야생멧돼지 ASF 발생에 따른 긴급대책’을 발표했다. 국내 ASF가 발생한 지 27일이 지나서다. 환경부·농림축산식품부·국방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정부는 지금까지 ASF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신속하게 긴급행동지침을 뛰어넘는 과감한 조치를 시행해왔다”며 “야생멧돼지에서도 ASF가 발생하며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대책을 추진키로 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정부의 발표와 달리 대책은 신속하지도, 긴급하지도 않았다. ASF가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전문가들은 멧돼지 매개체 설을 꾸준히 주장했지만, 정부가 이런 가능성을 무시하다시피 해왔기 때문이다.
ASF 발병 이틀째인 지난달 18일, 환경부는 “야생 멧돼지에 의한 사육돼지 감염은 러시아 2건 외에 보고된 바 없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7번째 ASF가 발생한 26일에도 환경부는 “지난해 8월 이후 1094마리의 전국 멧돼지를 검사한 결과 ASF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도 “물리적으로 (북한 멧돼지가) 내려올 수는 없다는 것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거들었다.
하지만 이내 머쓱해졌다. 3일 비무장지대(DMZ) 내 멧돼지 폐사체에서 ASF 바이러스가 발견되면서다. 그제서야 헬기를 투입해 방역에 나서는 등 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감염원인 야생 멧돼지를 통한 2차 감염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는 게 이유다. 남하ㆍ전염 가능성이 없다던 멧돼지는 어느새 ‘감염원’으로 탈바꿈했다.
정부가 멧돼지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철책을 설치하고 포획틀·총기를 이용한 포획을 시행하기로 한 것도 전형적인 '뒷북' 정책이다. DMZ 남쪽의 멧돼지에 대해서는 손 놓고 있다가, 11~12일 강원도 철원에서 5건의 야생멧돼지 ASF 감염이 확인되자 내놓은 것이다.
방역(防疫)은 예상되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조치다. 예방의 ‘예(豫)’는 미리·먼저라는 뜻이다. 현상이 직접 나타난 후에 움직이면 방역이라 부르기 힘들다. ASF 발생국 중 집돼지에게서만 증상이 나타난 국가는 없다. 정부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철책·사람이 만든 경계를 과신한 탓이 크다. 정부의 조치가 ASF를 뒤따라 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바이러스는 맨눈으로 보이지도 국경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허정원 경제정책팀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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