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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민족' 담론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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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자현 교수 미완성 유고 모은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

연합뉴스

명량해전 재현 행사
[전라남도 제공,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가의 후원을 받든, 사적으로 기획되든 임진전쟁과 병자호란의 전사자가 영면하면서 시작된 기념문화는 지금까지 민족의 담론을 영속시켰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유명한 저서 '상상된 공동체'에서 '민족'(民族)이 왕조국가와 종교 공동체가 붕괴한 근대에 상상을 통해 형성된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은 근대에 만들어졌을까.

한국사를 전공한 고(故) 김자현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그의 남편이 미완성 유고를 모아 펴낸 신간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에서 한국인의 민족 담론이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형성됐고, 1636년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공고화됐다고 분석한다.

한국, 중국, 일본이 뒤얽혀 싸운 동아시아의 대규모 전쟁인 임진왜란은 중국에서 왕조 교체를 야기했는데, 한국에서는 전후 급격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는 대신 민족 담론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국 조정은 육지와 바다를 막론하고 전력투구했는데, 6년이 넘는 기간에 50만명 이상의 전투병을 투입한 이 충돌은 사실상 16세기 세계 최대 전쟁이었다"며 여러 요인을 중심으로 자신의 견해를 논증한다.

임진왜란에서 살펴야 할 첫 번째 요소는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의 깊이와 날카로움이다. 1392년 건국한 뒤 200년 동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 조선에 임진왜란은 극심한 충격이자 공포였다. 전쟁에 대응해 조선 사람들은 격정적 격문을 보내거나 의병에 참여해 왜군과 싸웠다. 그 과정에서 단결된 공동체로 조선의 이상을 만들고 애국심을 고양했다는 것이 저자 생각이다.

그는 "임진전쟁은 일본의 조건 없는 철수로 종결해 조선이 수치를 땅에 묻고 타협하지 않는 영웅적 자질과 애국심을 제시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했다"며 "만주족이 병자호란으로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평가절하한 이후 민족 담론은 더 피할 수 없고 긴급한 것으로 제시됐다"고 강조한다.

유학을 숭상한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존재도 중요했다. 사대부들은 '충'(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고, 전쟁 이후에도 조선이라는 나라와 문화를 형상화하고 정의할 것을 요구하는 세력으로 남았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전후 기념사업에 대한 폭넓은 행위자의 열망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유교는 사상이자 생활 관습이었는데, 문서와 의식이 결합한 기념 의례는 사적 기억을 국유화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임진왜란과 민족을 논하면서 제시한 근거 중 흥미로운 대상은 한글이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이전까지 지방적이고 사적이며 여성적인 글자로 인식됐으나,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 사람만 해독할 수 있는 메시지 전달 방법으로 부각됐다.

그는 "임진전쟁은 의사소통을 위한 다양한 도구를 이용한 전쟁이기도 했는데, 조선 정부는 한글 문서를 조선인만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며 한글은 '우리의' 그리고 '민족적인' 것을 의미하는 언어로 변화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한글로 된 민족적 소통 공간의 도래는 한글과 한문 사이의 성격과 지위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며 "글쓰기 문화에서 한글의 배포는 압도적 한문 언어공간의 헤게모니 아래에 자국어가 성장할 공간을 줬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임진전쟁을 분석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내린 명령 중 '서비스 여성' 혹은 '첩'으로 번역할 수 있는 '쓰카이메'를 요구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는 서비스 여성에 대한 제도화를 최상위 기구에서 시작한 점이 특이하다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부에 대한 정치적 논란을 고려할 때 '서비스 여성'에 대한 언급은 잠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큰 주제"라고 평가한다. 일본이 오랫동안 국가 차원에서 여성을 동원했음을 입증할 사실(史實)이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한 셈이다.

너머북스. 주채영 옮김. 288쪽. 1만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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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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