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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공공임대주택-구멍뚫린 복지](2)중산층 82% “공공임대 생각 있다”…왜 이렇게 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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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한국리서치, 1000명 대상 ‘임대주택 인식’조사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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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득층 고려보다 ‘내 이익’먼저

높은 집값에 주거불안 탓

사회적 약자 배려 인식 흐려져

“나도 중산층 임대주택 들어가볼까”


정책의 바람직한 목표 질문에

응답자 31% “집값 안정” 답해

소득불문 주거비 안정 요구 높아


‘젊은 세대 지원’ 정책 요구

50대에서도 20%로 높아


대출도 감수한 내집 장만 욕구

임대 후 분양전환 67%가 ‘긍정’

“자산 증식에 소득보다 부동산”


집값 5억7000만원 중 4억원을 은행 대출로 마련했다. 무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2년마다 전셋값을 올려주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보금자리를 옮기는 일에 신물이 났을 때였다. 직장인 송모씨(46)는 5년 전 그렇게 서울 용산구에 ‘내 집’을 장만했다. 이후 가족여행은 물론 식료품비마저 줄였다. 하루에 한 갑 이상 피우던 담배는 절반으로 줄였다. 송씨는 “매달 원금과 이자를 합쳐 200만원 가까이 나가니 용돈은 30만원을 넘어본 적이 없다”며 “집에 매여 사는 것 같다. 그래도 집 한 채가 있으니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집 한 채. 사전적으로는 주택 1개를 뜻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전 재산’이라는 의미이다. 성인이라면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대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 빚을 낸다. ‘내 집 마련’이라지만,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려면 수십년간 따박따박 원리금을 갚아야 한다. 현재 소득으로는 감당할 수 없이 치솟은 집값에 미래의 노동 대가까지 끌어다 충당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름을 바꿔가며 ‘중산층 공공임대주택’을 내놓는 이유는 그래서다. 본래 공공임대는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이 목적이지만, 소득만으로 주거를 마련하지 못하는 것은 저소득층이나 중산층이나 같지 않으냐는 발상에서 시작했다.

경향신문은 공공임대와 중산층 임대주택 등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는 의외였다. 응답자들이 바라는 공공임대 정책 목표는 ‘저소득층의 주거환경 개선’ 등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지원이 아니었다. ‘청년·신혼부부 등 젊은 세대 지원’이나 ‘중산층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주택 공급’ 등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요구가 먼저였다.

공공임대를 ‘빈곤 주택’으로 보는 시각이 있음에도 응답자 10명 가운데 8명은 공공임대에 입주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이 중에는 고소득층도 포함돼 있다. 왜 이런 답변을 한 걸까. 설문조사는 지난달 20일부터 23일까지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 “내 이익부터…인지부조화 심각”

공공임대 정책의 바람직한 목표에 대해 물었다. 응답자의 31.2%는 ‘집값 안정’이라고 답했다. 이어 ‘청년·신혼부부 등 젊은 세대 지원’과 ‘중산층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주택 공급’이 각각 21.5%, 19.7%로 뒤를 이었다. ‘쪽방촌과 고시원 등에 사는 저소득층의 주거환경 개선’과 ‘장애인 및 노인 등 취약계층 돌봄’ 등 흔히 알고 있던 공공임대의 당위적 목표를 떠올린 비율은 각각 17.0%, 10.6%에 불과했다.

연령별로 원하는 정책 목표도 확연히 달랐다. 19~29세는 ‘청년·신혼부부 등 젊은 세대 지원’이 38.3%로 가장 높았다. 청년으로 분류되는 30~39세에서도 같은 응답이 25.2%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50~59세, 60세 이상에서도 청년·신혼부부 지원 응답이 각각 20.0%, 18.5%로 높았다. 정책 수혜 당사자인 2030 젊은층과 자녀가 있는 5060 부모세대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40~49세에서는 ‘집값 안정’(30.8%) 외에 ‘중산층 포괄하는 다양한 주택 공급’(27.9%)이 다른 연령대보다 높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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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요건이 된다면 공공임대에 입주할 의사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79.0%가 ‘그렇다’고 했다. 입주 의사가 없다는 응답(21.0%)보다 4배가량 높았다. 월평균 가구 소득 200만원 이상~300만원 미만인 저소득층의 입주 의사가 83.6%로 가장 높았지만, 상대적으로 고소득 중산층인 600만원 이상~700만원 미만도 82.4%가 공공임대에 입주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대다수가 공공임대 정책을 우호적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박은철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철저히 이해관계에 따라 응답한 이 같은 결과를 “정답을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우선 추구하는 ‘인지부조화’ 현상이 심각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연구위원은 “공공임대는 주거불안에 시달리며 임대료 부담이 큰 하위 소득층을 위한 정책인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의에 대한 인식이 옅어지는 것 같다”며 “공공임대에 들어갈 수 있는 소득 범위를 지속적으로 넓혀온 정책 탓에 한국에서도 사회보장 제도가 잘 갖춰진 유럽처럼 중산층도 공공임대에 입주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산층 임대주택 확대에 대한 질문에서도 58.6%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한다’는 응답은 27.8%에 그쳤다. 실제로 경향신문이 만난 중산층 이상 가구의 대다수는 공공임대 입주를 고려해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 민간기업형임대주택 ‘뉴스테이’와 장기전세주택 ‘시프트(Shift)’ 등 중산층 임대주택이었다.

송씨도 용산구에 집을 구입하기 1~2년 전 은평구의 한 시프트를 알아본 적이 있다. 그러나 “잠시 저렴한 집에 살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자칫 내 집 마련을 포기하고 임대주택에만 머물게 될 것 같아 그만뒀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 공공임대 입주를 희망하지 않는 이유로는 ‘극빈층으로 보는 부정적 시선 때문’이 33.9%로 가장 높았다.

■ ‘집 한 채’에 달린 안정된 미래

내 집 마련에 진력하는 이들의 욕망을 탓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집 한 채는 끊임없이 생존과 연결된다. 주거불안은 집을 장만해야 해소된다. 미래 소득까지 당겨 장만한 주택인 만큼 집값이 떨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집을 통해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집은 사업 실패나 중병 등으로 경제적 위기에 빠졌을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기도 하다.

경기 고양시에 사는 백모씨(48)에게도 집 한 채는 유일한 ‘뒷배’다. 4년 전 집값의 절반이 조금 안되는 1억6000만원을 은행에서 빌려 30년간 매달 60만원을 갚아나가야 한다. 집의 용도는 앞으로 백씨의 경제사정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대출금을 다 갚으면 주택연금 담보물로 편안한 노후의 종잣돈이 되겠지만 못 갚았을 때는 집을 팔고 지방으로 내려갈 생각도 하고 있다. 아이가 대학에 가거나 결혼을 할 때 목돈 마련을 위한 밑천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집이라도 없으면 얼마나 서러울까. 전·월세를 전전하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그나마 이거 하나 있다는 게 위안이 된다”며 “돈을 언제 다 갚을 수 있을까 불안하지만 없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빚으로 사는 껍데기만 중산층”이라고 했다.

자력으로 내 집 마련을 꿈꿀 수 없는 현실은 청년들에게 더 가혹하다. 강모씨(29)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강씨는 지난해 은평구 재개발 지역의 한 연립주택 반지하 매물을 사들였다. 투자금액은 2억원. 매달 180만원이 대출금으로 나가지만, 낡은 연립주택이 재개발을 거쳐 새 아파트로 탈바꿈했을 때를 상상하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라도 집을 사놓지 않으면 그 세계로의 진입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공공임대는 이들에게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구로구의 한 시프트에서 5년간 거주해온 김모씨(43)는 “재미있는 현상”이라며 “장기전세는 최장 20년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이사를 안 갈 것 같지만 의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계속 오르는 집값이 문제다. 같은 평수의 옆집이 집값이 오르면서 자산가치가 불어나는 것을 보며 오히려 공공임대에 들어와 자산 축적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김씨는 얼마 전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 “집값 안정이 최고의 복지”

조사 전반에 걸쳐 ‘주거비 안정’에 대한 요구가 높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임대 정책의 바람직한 목표를 묻는 다소 큰 범주의 질문에서 ‘집값 안정’(31.2%)이 1위를 차지했으며, 공공임대 입주를 희망하는 가장 큰 이유로도 ‘시세 대비 저렴한 임대료’(55.4%)가 꼽혔다. 중산층 대상 주거복지 정책의 우선순위를 묻는 질문에서도 ‘집값 안정’(34.2%) 응답이 가장 많았다.

주거비 안정 요구는 저소득층 대상 공공임대 정책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목표를 묻는 질문에서도 두드러졌다. ‘저렴한 보증금과 임대료’가 46.2%로 가장 높았는데, 월평균 가구 소득이 200만원 미만과 200만원 이상~300만원 미만 등 저소득층에서 각각 54.4%로 월등히 높았다. 그다음이 ‘장기간 거주 안정’(27.6%) ‘자립기반 마련’(16.8%) 등의 순이었다.

이는 저소득층이나 중산층 모두 소득과 집값 격차에 따른 주거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사회안전망이 미흡한 가운데 가구 소득에서 주택을 취득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가장 많이 나가는 만큼 그 돈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집값 안정이 최고의 주거복지’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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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으로는 가파르게 상승하는 집값을 따라잡을 수 없다. 2009년 2574만원이었던 월평균 실질임금은 지난해 2899만원으로 12.6% 올랐다. 그에 반해 전국 주택 중위가격(주택을 가격별로 세웠을 때 가운데 주택의 값)은 같은 기간 2억1977만원에서 3억1738만원으로 44.4% 상승했다. 집값 상승 속도가 실질임금보다 3배 이상 빠른 것이다. 비교 대상을 서울 집값으로 바꾸면 중위가격 상승률은 45.6%(4억3040만원→6억2660만원)로 소득과의 격차는 더 커진다.

집값이 급등할수록 주택 구입 시 대출 의존도는 커진다. 그러다보니 ‘현 정부의 부동산 대출 규제가 중산층의 내 집 마련을 어렵게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48.3%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36.8%였다. 나머지 15.0%는 ‘모르겠다’고 답했는데 이 중 19~29세와 30~39세의 응답이 각각 26.7%, 16.3%로 다른 연령대보다 높았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에 2030 젊은층에서는 내 집 마련을 당장의 자기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집 마련 욕구는 여전히 컸다. 5년이나 10년 임대 후 주택 소유권을 임대인에게 우선 분양하는 ‘임대 후 분양전환’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무주택 서민에게 내 집 마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응답이 67.0%로 높게 나왔다. ‘임대주택 재고를 확보하지 않고 분양물량으로 소진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라는 응답은 23.7%였다. 공공임대를 시세차익이 큰 내 집 마련을 위한 지렛대로 여겼다.

‘믿을 건 부동산밖에 없다’는 인식은 계속될까. 그간 자산 유지 및 증식의 주된 투자활동에 대해 물었다. ‘임금 등 소득’이 78.3%, ‘부동산’이 12.3%였다. 그러나 앞으로 자산을 유지하거나 불리는 데 기여할 것으로 생각하는 투자활동에 대해서는 ‘임금 등 소득’이 61.6%로 줄고, ‘부동산’이 21.2%로 늘었다. 소득보다 부동산에 거는 기대가 더 컸다.

이성희 기자 mong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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