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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원유헌의 전원일기](6)천둥벌거숭이 지켜봐 주고 품어주는 앞집 할매 그 이상의 ‘간전댁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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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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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저녁 간전댁 할머니가 집으로 놀러온 필자의 아내에게 새로 구입한 옷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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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어 심으까, 새는 이 정도 띄우까”

귀농 첫해 텃밭에 감자 심는 내게

70년 베테랑은 의향을 물어보셨다

공자가 말한 지극한 예가 이런 걸까


“함무니~” 뽀르르 달려가는 아내

둘은 35세 차이 극복한 절친이다

“선재네가 와 줘서 내가 고맙지라”

고마운 건 우린데…참 미치겠다


“뜨거우면 오래 못 간다더라”는

3년 전 왔다 서울로 U턴한 친구엔

앞집이나 할머니가 없었을 거다

나도 그리 뜨거울 생각은 없다

할머니 정도로 따뜻하면 좋겠다


세상이 요지경이다. 안 그런 적이 있나 싶지만 요즘 조금 심하다. 내가 세상과 접하는 방법이라야 TV 아니면 인터넷뿐이지만 그 안에 가득 찬 색깔과 감정은 채도와 명도가 너무 강해서 콘트라스트(대비)만 남아 있다. 보아 하니 걸리면 반칙이고 안 걸리면 테크닉인데, 아직 안 걸린 것들이 걸릴 때까지 목소리 높이는 형국이다. 염치없는 세상. TV는 그 꼴을 뉴스라는 이름으로 중계하고 있다. 참 싫다.

그 싫은 TV에서 내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뉴스는 아니었다. 최근 한 종편 채널에서 연예인들이 이곳 구례에 내려와 생활하는 모습을 방영하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제작진이었다. 여차저차한 이유로 귀농한 사람이 슬쩍 출연해 사는 모습도 보여주고 얘기도 해주길 원한다고 했다. 아무리 농촌 체험 프로그램이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 방송은 비주얼을 꽤 따지는데 아직 내 실체를 못 봐서 던진 섣부른 제안이었다.

나를 캐스팅한 이유를 듣자 하니 연고도 없이 내려와 돈 안되는 농사를 지으면서 10년 가까이 버틴 케이스를 찾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나뿐인가 하는 생각에 대타를 찾기 시작했다. 의외로 쉽지 않았다. 귀농한 사람은 꽤 있었고 일부는 10년 넘게 있었지만 연고도 없이 내려온 사람이 없었다. 마당발인 동생에게 물어도 “형님이 딱인데 왜 찾아요?” 반문했고, 군청에 문의해도 “찾아보겠다”고만 했다. 내가 희한한 놈이었다. 희소성은 있지만 값어치는 없는….

한 친구가 생각났다. 3년 전 자연을 사랑해서 농사짓겠다던 잘생긴 친구였다. 그 친구가 얼마 전 서울로 올라갔다. U턴이었다. 어느 연구결과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와 징그럽게 싫어지는 이유가 똑같다고 했다. 그도 그랬다. 자연을 사랑해서 내려왔는데 농사짓다 보니 그 자연이 지긋지긋해졌다고 했다. 농촌을 자연으로 알고 농사가 자연스러울 거라고 착각한 결과였다. 조금만 버텼으면 이 친구를 방송에 소개해줄 수 있었을 텐데….

겨우 방송에 맞는 경우를 하나 챙겨서 PD와 작가를 만났다. 험한 일 하기엔 착한 사람들 같았다. 나를 보고도 실망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 대화하면서 ‘내 실물을 보고도 방송에 쓸 테냐?’는 마음으로 다리까지 떨었지만 ‘그래, 오락 프로그램에 딱 맞아’ 생각하는 듯 물러서지 않았다.

“저희 농장은 그림이 잘 안 나와서 힘들 것 같습니다.”

“촬영은 저희가 알아서 얼마든지 예쁘게 할 수 있습니다.”

“촬영 시기에 수확할 게 많지 않거든요.”

“그 점도 저희가 알아서 할 수 있거든요.”

“제가 소개해 드릴 분이 딱입니다만….”

“원 선생님이 잠깐이라도 나와 주시는 걸로….”

팽팽한 미소 싸움 끝에 나는 한발 뺐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바짓가랑이 한쪽 잡았다고 여긴 상태로 헤어졌다. 검은 능선 위로 붙은 진분홍 하늘을 보면서 집에 막 들어서는데 휴대폰이 울었다. 할머니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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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전댁 할머니와 아내가 지난 초봄 겨우내 추위를 이기고 버텨준 배추 봄동을 수확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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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와서 감자 캐기는 힘들겄지라? 들깨 고랑 풀 뽑기는 좋겄는디요.”

이곳에선 고구마도 감자라고 부른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감저(甘藷)’는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를 가리키는 말이었단다. 어쨌든 할머니는 나 몰래 농장에 폐쇄회로(CC)TV를 달아 놓으셨는지 그곳 상황을 꿰고 계셨다. 할머니 말씀은 강제집행의 성격을 띤다. ‘선재 아빠 바쁘면 내가 걍 걸어가서 하다 오면 되구요’라는 진심 어린 말씀이 생략돼 있지만, 그것은 아니지 하는 생각에 농장에 모시고 갈 수밖에 없다.

농장에서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날은 내가 반 죽는 날이다. 무릎이 안 좋아 허리만 굽히신 채 일에 돌입하면 웬만해서 허리를 펴시지 않는다. 이날도 할머니는 허리를 허옇게 드러내고 상체를 파묻듯 숙인 채 풀을 뽑으셨다. 모기도 포스트시즌을 뛰는지 아직 활동 중이었다. 옆에 가서 윗도리를 잡아당겨 드리며 모기를 쫓아내자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냅둬요. 모구(모기)는 농사 안 지니께 이렇게라도 먹구 살아야지요.”

간전댁 할머니. 1934년생 86살 닭띠. 아내의 절친이다. 택호를 말할 때 ‘~댁’이 아니라 ‘~덕’이라고 부르는 탓에 마을 어머니들 간에 ‘간전떡’ 혹은 ‘간전성(형)’으로 불린다. 부모님 연세랑 비슷하기도 하고 웬만하면 ‘어머니’로 부르는데 유일하게 ‘할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내 때문이다.

동네 친구가 물어온 적이 있다.

“자네는 왜 간전떡 엄니만 할머니라고 부른대?”

“선재 엄마가 첨부터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나만 어머니라고 하면 우리 둘 관계가 어찌 되겄나. 가뜩이나 윗집 어르신이 집사람 가리키면서 나한테 그 집 딸래미냐고 묻는데. 두 번이나.”

“그거야 자네랑 제수씨가 나이 차이가 나니까 그런 거지. 몇 살 차인디?”

“두 살.”

머뭇거리던 친구가 자리를 뜨며 말했다.

“자네가 잘못했구마.”

“내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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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전댁 할머니가 농장에서 말려 놓은 들깨를 털고 있다. 3년째 들깨를 심었지만 아직도 갈무리 작업이 서툴러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초보 농부임을 자백한다.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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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전댁 할머니는 우리에게 앞집 할머니 그 이상이다. 귀농 첫해 마당 텃밭에 감자를 심는데 동네분들이 도와주겠다고 오셨다. 아는 농사라고는 책에서 본 그림밖에 없을 때 잘됐다, 고맙다 싶어 덤비는데 할머니는 오히려 나한테 물으셨다.

“감자를 엎어 심으까요, 뒤집어 심으까요?”

“감자 새를 이 정도 띄우면 되겄소?”

“두둑 옆으로 심고 북을 줄라요 아니면 가운데 그냥 높이 심을라요?”

할머니께 그동안 해 온 방법이 있을 텐데 왜 저한테 묻고 그러시냐고 했더니 말씀하셨다.

“선재 아빠가 생각했던 게 있을 텐데 워쩌케 내 맘대로 심는다요.”

산전수전 70년 경력의 베테랑이 이제 훈련병인 내게 뜻을 묻고 계셨다. ‘지극한 예(禮)는 물어서 하는 것’이라던 공자 말씀을 눈앞에서 실물로 접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의도하신 건지 몰라도 남다른 유머 감각을 갖고 있다. 내가 먼저 지쳐서 할머니한테 물 한 모금 잡숫자고 농막으로 끌고 가는데 감나무 아래 채 덜 익고 떨어진 대봉 감을 주우셨다.

“이런 것두 장에 내가면 다 팔렸는디.”

태풍이 지나간 뒤라서 나무에 달린 것은 거의 없고 바닥에 떨어진 채 익어가는 감이 아까우셨나 보다. 장단이라도 맞출까 하여 말씀드렸다.

“시장에 한 번 갖고 가 볼까요?”

“그때 사 묵던 사람들은 벌써 다 죽었지라. 인자 이거 사 묵는 사람이 있간디요?”

무안한데 재미있기 어렵다. 할머니는 그걸 해내신다. 또 뭔가를 말씀하고자 할 때 문학적 인용을 자주 하신다. 대개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지만 적절한 타이밍을 아신다.

“가실(가을) 일 할 때는 오줌 누고 골마리(허리춤)도 못 추켜 올린답디다. 선재 즈그 어매는 애들 가르치고 글 쓴다고 바쁘고, 선재 아빠 혼자 하느니 손이라도 보탤라구 하는 거잉께 부담 갖덜 말어요. 난 암시랑토 않아요. 아 보리방아 찧을 때 옆에서 머리만 까딱거려도 도움된다고 안 합디여.”

할머니 걱정하는 말씀 드리려는 순서에 선수를 치셨다. 난 뭘 갖다붙여서 드릴 말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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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러미 보내는 날을 기억하는 간전댁 할머니가 무청 시래기 삶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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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만이 아니다. 몇 해 전 아내가 집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코앞에 삼베 보자기 같은 걸 흔들면서 들떠 있었다.

“유헌씨 이거 좀 봐! 내가 차 덖을 때 차 비비기 좋을까 싶어서 할머니한테 이불집 가면 광목천 살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돌아가신 할아버지 무명 두루마기를 다 뜯어서 밤새 만드셨대. 어쩌면 좋아….”

밝은 줄 알았던 표정은 울먹이고 있었다. 누르스름하게 빛이 바래 세월과 손때가 느껴지는 천이 예술품 조각보처럼 촘촘히 꿰매져 있었다. 마침 할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죽은 영감 거여. 내가 젊어서 만들아 준 거이라. 꼬실라뿌까 하면서 몇 년을 들었다 놨다 했는디 선재 어매가 쓸모가 있어서 쓰믄야 내가 좋지.”

아내를 쳐다보며 못 보던 미소를 지으셨다. 할머니는 아내를 손주로 여기셨다. 메주 쑨다고 한 날 아침이면 숯 가득한 화덕 솥에는 이미 콩이 삶아져 있고, 김장하는 날이면 배추는 숨 죽은 채 물이 빠져 있고, 장 담그는 날이면 사람만 한 항아리가 씻겨 엎어져 있었다. 우렁할머니이시다.

꺾인 운동화 질질 끌고 혀 짧은 소리로 “함무니~” 부르며 뽀르르 달려가는 아내, 머리에 흰 서리가 덮인 지 아내 나이만큼 되는 간전댁 할머니는 서른다섯 살 차이를 극복하고 자타 공인 절친이 됐다. “긍게 영감 보낸 그날이 딱 7월9일이여”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레퍼토리. 아마 아내는 이 이야기를 수십번은 들었을 거다. 그래도 할머니 옆에 누워 매번 처음 듣는 양 “그래?” 대꾸하며 귀를 세운다.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할머니가 아내와 있을 땐 그냥 외할머니 모습이다.

“선재네가 와 줘서 내가 고맙지라.”

우리가 고맙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하시는 말씀이다. 참 미치겠다.

서울로 돌아간 친구에겐 앞집이 없었거나 할머니가 없었을 거다. 그 친구는 “뜨거우면 오래 못 간다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지만, 지도 오래 못 간 것에 비해 뜨겁진 않았다. 나도 그리 뜨거울 생각 없다. 할머니 정도로 따뜻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만큼은 안되더라도 체온만큼만 따스한 사람이면 좋겠다. 누군가 천둥벌거숭이처럼 살고자 덤빌 때 지켜봐 주고 품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처럼 한 가족만의 천사라도 되면 참 좋겠다.

그나저나 아내 말대로 자기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고 나는 그 나라를 구해서 만난 거라면, 할머니는 무슨 죄를 지으셨던 걸까. 흐미, 그때도 아내랑 같은 편이셨는갑네.

할머니, 계셔줘서 고맙습니다. 다음 생엔 정해인, 공유,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중에 고르실 수 있을 거예요~.

▶필자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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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생. 44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2011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구례로 내려가 농부입네 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각종 아르바이트로 현찰을 보충하며 연명한다. 2018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르네상스)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으나 8년째 나아진 건 없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산다.


원유헌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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