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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자본시장 속으로] 핵심가치와 확실성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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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 대신지배구조연구소장

이투데이

조직에는 저마다 추구하는 핵심가치(Core Value)가 있다. ‘품질’이 핵심가치인 회사는 제품에 중대한 하자가 발생하는 경우 즉시 제품을 회수하고 조건 없이 보상해줄 것이다. ‘신선함’을 핵심으로 여기는 식당은 당일 식자재가 남을지라도 과감히 처분할 것이다. 이렇듯 핵심가치란 조직 구성원들이 의사결정 시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원칙으로, 주로 애매한 사정들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그 빛을 발한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에서는 기업 주주총회의 의안 분석 시, 연구원들에게 ‘확실한 팩트(Fact)’에 기반을 둔 의견 제시를 강조하고 있다. 원칙을 세우려면 본질적인 접근이 중요한데, 자본시장의 냉정한 ‘현실’에서 ‘당위’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은 속성상 다른 어느 시장보다 유난히 확실성을 추구하는 시장이다.

좋지 않은 루머가 사실로 밝혀지면 오히려 주가가 상승하는 기정사실화(Fait Accompli) 현상이 흔히 발생한다. 사실로 확인된 악재가 불확실성보다 오히려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에 소중한 돈을 투자하는 주주로서는 가능한 사실을 확인한 후에 출자하고 싶기 때문이다. 주어진 법과 원칙 내에서는 투자금을 ‘지속적으로’ 불려줄 기업이 최선이다. 주총 안건들을 도덕성이나 단순한 의견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확실한 사실을 추구하는 것은 ‘의사결정 효율화’와 ‘적절한 견제’라는 두 가지 상충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지배구조의 본질에도 부합한다. 상법상 자율에 근거한 경영판단을 존중하고 견제시스템 또한 최소한의 형식적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지배구조에서 왜 이사진의 선의(Integrity)가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인지도 여기서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사에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했기에 기업 외부에 존재하는 주주는 주주권익을 해치는 명백한 사실이 있을 경우에는 당당히 반대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다만, 반대 대상이 되는 사실의 범위와 정도에 대해서는 의결권 자문사마다 차이가 있다.

일례로 합병을 들 수 있다. 당 연구소는 결과적으로 합병비율이 다소 불합리해 보여도 그 밸류에이션 자체만으로는 반대하지 않는다. 밸류에이션은 ‘확실한 팩트’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가치는 해당 기업 자체만 평가하느냐(절대평가) 또는 다른 유사 기업과 비교하느냐(상대평가)에 따라, 혹은 이익을 중심으로 기업가치를 평가하느냐(PER) 또는 자산을 중심으로 평가하느냐(PBR)에 따라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밸류에이션에는 정답이 없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절차상의 흠결만큼은 확실한 반대 사유로 간주한다. 결과의 산출 근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을지 모르나, 그 과정상의 원인 행위는 명백하기 때문이다. 아직 가격의 공정성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나 제도, 가이드라인의 공백이 많은 한국 자본시장의 현실인 까닭이기도 하다.

2015년 S사와 그 계열사 간 합병 당시 의결권 자문사 중 당 연구소만 본건에 반대했는데, 밸류에이션 이슈를 시장에 처음 제기하면서도 합병비율만을 근거로 반대하지 않았다. 대주주도 법에서 보장된 한도 내에서 최대한 유리한 합병 시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당사의 반대 근거는 자사주 소각이 합병비율에 반영되지 않도록 동시에 공시한 ‘사실’ 때문이었다. 즉, 결과를 야기한 ‘확실한 원인’에 주목한 것이다.

H사의 분할합병 안건의 논란도 역시 ‘합법적이지만 불공정한’ 가격에 있었다. 회사 분할 시 캐시카우(Cash Cow) 사업부를 영업가치가 아닌 자산가치로 평가한 후, 당시 투자적격등급의 채권 이자율이 2~3%이던 시절 기업 가치 산정 공식의 분모에 해당하는 회사의 자본조달 비용(WACC)을 12.58%로 적용하며, 가격을 대폭 낮춰서 최대주주가 지배주주로 있는 회사와 합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 연구소는 결과의 근본 원인, 즉 시장에서 적절한 가격을 받을 기회를 박탈해 비상장사로 분할한 그 ‘행위’에 반대했다.

D사의 사내이사 선임 건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 연구소 입장에서는 다수의 겸직, 일가의 폭언·폭행 및 갑질 논란 등으로 인한 브랜드 가치 하락, 횡령 배임 혐의로 인한 기소 등 타 자문사들이 지적하는 그 어느 것도 확실한 반대 사유로 보이진 않았다. 그 대신, 후보자가 재임할 당시 부실기업인 계열사 지분 및 무보증 사모사채 인수 결정 등으로 지원했으나 결국 파산한 ‘기업가치 훼손 이력’이라는 확실한 사실로 반대를 권고한 바 있다.

이제 기관투자자들도 자신들의 독자적 핵심 원칙을 천명하고 고객의 자금을 관리하는 시대가 됐다. 의결권 자문사들도 의견이 다양할수록 지배구조 논의를 활성화할 수 있어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과 법의 취지, 지배구조의 본질 또한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건전하고 역동적인 균형과 발전을 위해 확실성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애매한 문제일수록 더욱 그렇다.

[김호준 대신지배구조연구소장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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