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법무장관 부인 비공개소환에
작전차량ㆍ대역 동원하는 등 첩보전 방불케 해
1999년 5월 30일 저녁 당시 김태정 법무부장관의 부인 연정희씨를 뒷좌석에 태운 소나타 승용차가 서울 서초동 자택을 빠져나와 서울지검으로 향하고 있다. 취재진을 따돌리려는 검찰의 교란작전에도 불구하고 원유헌 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가 ‘옷 로비’ 의혹 사건 최초로 연씨 모습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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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장관의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처음으로 비공개 소환된 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에 검찰 로고가 유리창에 비친 먹구름 위로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류효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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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이 피의자 등 사건 관계인 검찰 조사 시 공개 소환하는 관행 전면 폐지를 지시한 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포토라인이 설치돼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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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장관의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9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에 세 번째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검찰의 비공개소환 방침에 따라 이번에도 정 교수의 모습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비공개소환은 일반적인 청사 출입 절차를 생략하고 직원 통로를 제공하는 등 검찰의 협조 없이 불가능한 만큼 특혜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정 교수에 대한 검찰의 철저한 비공개소환은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20년 전인 1999년 이른바 ‘옷 로비’ 사건을 수사한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당시 김태정 법무부장관의 부인 연정희씨를 세 차례 소환 조사하면서 ‘작전차량’과 대역까지 동원해 취재진을 따돌렸다.
2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소환 대상자가 검찰에 대한 지휘감독 권한을 갖는 현직 법무부장관의 부인이라는 점, 형평성 및 특혜 논란을 무릅쓰고 검찰이 비공개소환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두 사안은 판박이처럼 흡사하다. 그 과정에서 취재현장 질서를 유지해 온 포토라인이 무력화되고 국민의 알 권리 침해 우려가 제기된 것 또한 비슷하다.
물론 연씨는 고소인, 정 교수는 피의자 신분이고, 당시 검찰이 권력 눈치 보기와 의혹 덮기에만 급급했던 데 반해 지금의 검찰 수사는 거침이 없다는 점에서 두 사건의 차이는 크다. 비공개소환에 대한 비판을 대하는 자세도 사뭇 다르다. 20년 전 검찰이 극비소환에 대해 얼버무리듯 넘어갔던 데 비해 윤석열 검찰은 이참에 아예 공개소환 폐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검찰의 공개소환 폐지는 피의자 등 사건관계인의 인권 보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검찰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특정 인물 과잉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고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해 왔는지 되짚어 필요는 있다. 정 교수에 대한 비공개소환을 계기로 20년 전 검찰의 법무장관 부인 극비소환 작전을 재구성해 봤다.
밤 늦게 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검찰 청사의 1999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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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소환 작전(1999년 5월 28일)
1999년 5월 28일 밤 검찰은 연씨를 고소인 자격으로 첫 소환 조사했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대다수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기였기에 상류층 부인들이 수천만 원짜리 옷 로비에 연루됐다는 의혹만으로도 여론은 들끓었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만큼 수많은 취재진이 연씨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결국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검찰의 극비소환 작전 때문이었다. 이날 밤 10시 30분 서초동 검찰청사 인근에 승용차 편으로 도착한 연씨는 검찰에 연락을 취해 수사관들의 안내를 받아 청사로 출두했고,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조사를 받은 후 극비리에 귀가했다.
◇2차 소환 작전(5월 30일)
일요일인 30일 이른 아침부터 서초동 김 법무장관 자택 앞으로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이틀 전 검찰의 ‘007 작전’에 속아 연씨의 출두 모습을 포착하지 못한 데다 사건 당사자들간의 해명이 엇갈리면서 연씨의 재소환이 확실시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날 오전 연씨가 이미 출두해 조사를 받고 있다는 가짜 정보를 흘렸다. 검찰의 교란작전에 아침부터 서초동 자택 앞을 지키고 있던 취재진은 혼란스러웠으나 대다수가 밤늦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원 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가 서울 서초동 연씨 자택 앞에서 촬영한 연씨의 모습. 다급한 상황에서 셔터를 눌러 상이 흐릿하지만 ‘옷 로비’ 사건 최초로 연씨의 모습을 보도한 특종 사진이 됐다. 사진은 1999년 5월 31일자 한국일보 1면에 실린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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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로비’ 사건은 검찰의 봐주기 수사에도 불구하고 특검과 국회 청문회까지 열리는 등 당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됐다. 1999년 8월 24일 국회 청문회에서 4자 대질신문이 진행되는 모습을 서울역 대합실의 TV 앞에 모인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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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씨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녁 8시가 넘어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이날 현장을 지킨 원유헌 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차장 문이 열리면서 승용차 한 대가 전면에 부착된 경광등을 깜빡이며 나타났고 자택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수사기관 등 관용차가 아니면 차량 전면에 경광등을 부착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분명 검찰 차량일 것이라 믿었다. 그 안에 연씨가 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3차 소환작전(5월 31일~6월 1일)
첩보전을 방불케 한 법무부장관 부인 극비소환 작전은 다음 날인 31일에도 이어졌다. 검찰은 이날 오후 4시께 옷 로비 사건의 또 다른 당사자인 이형자씨를 청사 정문 현관으로 불렀다. 이씨에게 기자들의 관심이 쏠린 사이 연씨가 서문을 통해 청사로 진입했다. 당시 서문 주차장 출입구 앞에서도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나 작전차량에 또다시 속고 말았다. 검정색 SM5 승용차가 진입하는 듯하다 청사 뒤편 마약수사반 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자 기자들이 쫓아갔고 연씨는 유유히 청사로 출두했다.
연씨는 1일 새벽 세 번째 소환 조사를 마친 후 귀가했는데, 이날 검찰은 대역까지 내세우는 치밀함을 보였다. 당시 검찰 청사 안팎에선 연씨의 귀가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50여명의 취재진이 길목마다 진을 치고 있었다. 새벽 1시경 한 여성이 뒷좌석에 웅크린 채 타고 있는 은색 승용차자 주차장 출구로 나서자 취재진이 몰렸고, 그 사이 닫혀 있던 반대편 청사 출입문이 열리면서 연씨를 태운 검찰 승용차는 자택 방향으로 사라졌다. 자택 앞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여성을 태운 은색 승용차가 자택 앞을 지나 멈춰 서고 취재진이 몰린 틈을 타 연씨는 검찰 직원의 경호까지 받으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검찰 직원과 황급히 뛰어들어가는 연씨의 모습이 동아일보 기자에 의해 포착되기도 했다.
국회 ‘옷 로비’ 청문회가 열린 1999년 8월 24일 4자 대질 신문이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일순씨, 이형자씨, 연정희씨, 배정숙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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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검찰은 “당사자가 노출을 원하지 않는 경우 비노출을 보장하는 것은 다른 참고인도 마찬가지”라며 연씨의 극비소환이 특혜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또 다른 사건 당사자인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의 부인 배정숙씨의 경우 들것에 실려 나오는 장면까지 언론에 공개하는 등 공정성 논란을 자초했다. 대역이나 차량 동원 역시 부인했지만 상부의 계획된 지시 사항이었다는 정황들이 검찰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단 5일 만에 법무부장관 부인이 연루된 ‘옷 로비’ 의혹 사건 수사를 마무리한 검찰은 연씨가 사건의 피해자라는 내용의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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