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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최문자(1943~ )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는 불시에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고 있다. 시인은 살아생전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에 인색했던 삶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고백한다. 그러는 사이에 슬픔은 배가 되고, 죄의식마저 느낀다. 뒤늦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사과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점점 아파오고, 남편의 죽음을 통해 새삼 죽음을 자각한 시인은 좀 더 절대자에 의지한다.
2013년 다음에 2015년이었으면 좋겠어
오늘도 어김없이 건초 더미 사이로 2014년이 보인다
2014년의 허리는 푹 패여 있다
죽음의 지푸라기가 날리고
때때로 깊어진다
오래된 우물처럼
집에 돌아왔을 때
남자는 죽어 있었다
삶과 죽음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
죽음은
죽자마자 눈을 더 크게 떠야 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뭉텅뭉텅 사라지는 중이었고
나는 왼쪽 폐 반을 자르고
진통제 버튼을 계속 누르다가
살아나는 게 무서워 함부로 하나님을 불러냈다
매일매일
새까만 풀씨가 날아와
물에 젖고
차가운 흰 꽃이 피고
미숙하고 슬픈 기사처럼 함부로 시계바늘을 돌렸다
절벽과 산맥을 넘다 밤늦게 돌아와 미래가 적힌 달력을 찢었다
- ‘2014년’ 전문
일곱 번째 시집 ‘파의 목소리’(2015년 발간)에서 시인은 남편을 “벽 같은 남자”(이하 ‘벽과의 동침’)였고, “나는 벽의 폐허”였다고 고백했다. ‘2013년’이라는 시에서는 봄에는 “폐를 잘라내고”, 가을에는 “교회 갔다 와보니 남편도 까르르 까르르 넘어갔다”고 했다. 또한 함께 산 40년 동안 “시 쓰는 이런 체위로 전력 질주”(‘달콤한 은유’)하느라 아내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남편이, 2014년 어느 날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왔더니 죽어 있다. 임종조차 하지 못한 느닷없는 죽음에 시인은 “눈을 더 크게 떠야 할 삶”을 두려워한다. “오래된 우물처럼” 늘 거기에 있을 땐 소중함을 몰랐는데, 막상 남편이 곁을 떠나자 난 자리가 너무 크다. 잘해준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못 해준 것만 기억에 생생하다. 문득 함께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미안함, 죄책감, 용서라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2014년이 통째 사라진다면 남편은 살아 있을까. 그렇다면 “해가 있을 때 건초를 말려라”는 격언처럼 남편을 살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은 “뭉텅뭉텅 사라지”고, “나는 왼쪽 폐 반을 자르고/ 진통제”로 고통을 견디다가, “어젯밤 이불이 젖”(이하 ‘위험한 하나님’)을 만큼 울면서 하나님을 찾지만 신은 “그래 안다”는 말만 반복해 들려준다. “함부로 시계바늘을 돌”리고, “미래가 적힌 달력을 찢”을 만큼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다. 공허한 마음에 “죽음의 지푸라기가 날”린다.
오늘은 남편의 3주기 기일
나는 오늘 오래오래 노를 저어야 한다
슬픔은 끈적끈적하고 사방으로 멀고 단단하다
사과를 깎고 있을 때
내가 욕조에 물을 틀고 있을 때
그는 나를 용서했을까
물을 잠그고 손을 말리고
노트북을 꺼내 어디를 펼쳐 봐도
용서받을 수 없겠지
용서처럼 달달한 휴식은 없는데
죄책감이 후회를 스쳐 지나갈 때
서로 뚫지 않고 왜 서로 은밀하게 스미나
용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보려고
몇 번이나 집을 걸어 나갔다
저수지 옆길을 돌아 발자국이 끝나면
이렇게 걸어서 곧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고 더 오래 걸었다
집으로 오는 길
그는 언제나 용서할 듯한 얼굴로 안경을 쓴 채
물새처럼 바다로 가고
노을 아래서 나는 허공을 젓고 있다
죄책감은
모래 언덕
그칠 줄 모르고 푹푹 빠지는 다음 생애가 있다
- ‘죄책감’
남편을 떠나보낸 지 3년이 되어도 시인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니 더 깊은 슬픔의 숲을 걷고 있다.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낮보다 혼자 견뎌야 하는 밤이 더 외롭고 쓸쓸하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비틀거리다 자주 웃고 그리우면 눈물 핑”(이하 ‘밤에는’) 돌고, “나의 실패담”을 쓰고, 밤새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피가 섞여” 나올 만큼 극에 달한 슬픔이 힘겹다. “끈적끈적하고 사방으로 멀고 단단”(‘죄책감’)한 슬픔에 시인은 죄책감을 느낀다.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
시인은 “사과를 깎을 때”나 “욕조에 물을 틀고 있을 때”, “물을 잠그고 손을 말”릴 때, “노트북을 꺼내 어디를 펼쳐 볼” 때 시인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남편에게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용서할 듯한” 표정만 지을 뿐 끝내 용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푹푹 빠지는 다음 생애”, 즉 현생에서 받지 못한 용서는 다음 생에까지 이어진다.
양 한 마리
잔뜩 하얗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풀 옆으로 다가가 풀을 뜯는다
저리로 가서
부끄럼도 모르고
아주 잠깐 은밀하게 남의 것을 쉽게 뜯고 먹는다
하루 종일 자기를 질겅질겅 밟아야
밥이 먹어지는데
질겅질겅 밥을 밟고 서서
밥을 먹는다
하얀 것들도 밥 앞에서는 온 힘으로 까맣다
양 한 마리
밥을 만지는 입이 둥글고 아름다워 보인다
목화솜처럼 하얗게 생겼지만
아주 잠깐 남의 긴 풀을 베어 간다
저 불량한 식사를 위해
양은 노래할 입이 없다
풀에겐
새하얀 공포
얼음 같은 입
너무 하얀 것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 ‘하얀 것들의 식사’ 전문
표제시 ‘오렌지에게’에서 보듯 파랑은 풋사랑을, 하양은 “사랑의 서쪽”(‘백목련’)을 상징하는 순수한 색깔이다. 또한 하양은 “내 몸에 없는”(이하 ‘흰 줄’), “세상에도 없고 싶은” 하나님의 “등 뒤에서/ 몰래 흰 줄 한 줄 긋고 싶”(이하 ‘흰 줄’)은 경건한 색깔이다. 반면 “노랗고 빨갛고 진분홍”은 “나의 죄들”을 상징한다.
시 ‘하얀 것들의 식사’에서 하양은 단순히 “양 한 마리”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 양’, 즉 인간이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양이 내 것도 아닌 “남의 것”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몰래 뜯어먹는다. 양식인 풀을 밟고 서서 풀을 뜯어먹는 “불량한 식사”를 한다. 생존을 위해 남의 풀을 뜯어먹는 입모양은 “둥글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된 행동이다. 졸지에 밥의 신세가 된 풀의 입장에선 “공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눈치 챘겠지만 “한 마리 양”은 시인을, “풀”은 선악과를 연상시킨다. 나의 탐욕이 힘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자책과 살아 있음의 죄의식이 시에 녹아 있다. 하지만 죄인은 나 한 사람이 아닌 “하얀 것들”, 즉 복수의 사람들이다. 고백을 통해 참회의 대상을 확장한 시인은 비누와 서랍, 시(詩)를 죄를 씻고 반성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슬픔과 고독과 고통이 목까지 차오를 때마다 시인은 스스로 묻는다. “삶과 죽음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최문자/ 민음사/168쪽/10000원.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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