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1991년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B형으로 추정됐던 범인의 혈액형이 30여 년 만에 O형으로 정정됐다.
이로써 유력 용의자 이 모씨(56)를 진범으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게 됐다. 최근 경찰은 이씨를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로 특정하고 수사본부를 꾸려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국과수가 5·7·9차 사건 증거물에서 이씨의 DNA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경찰이 화성연쇄살인사건 이후 줄곧 5·7·9차를 포함한 사건 용의자의 혈액형을 B형으로 특정하고 수사한 상황이라 혈액형이 O형인 이씨와 연관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과학수사에서 DNA가 일치한다면 범인일 확률이 99.9%"라고 말해온 경찰도 "혈액형이 다르다면 그 부분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다 이번에 국과수가 이씨와 같은 O형 혈액형을 증거물에서 찾아내면서 이씨의 진범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해소됐다.
그렇다면 경찰은 왜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혈액형을 B형으로 추정했을까. 경찰 안팎에서는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경찰이 혈액형 반응을 본격적으로 찾아낸 시기를 1986년 10월 20일 발생한 2차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보다 한 달 전 발생한 1차 사건에서는 이슬이 내리는 가을 새벽께가 범행 시각이어서 지문 등 이렇다 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차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빈 우유 팩 2개의 타액에서는 B형과 O형 혈액형이 검출됐다. 경찰은 피해자(당시 25세) 혈액형이 O형인 점을 감안해 B형이 용의자일 가능성을 높게 뒀다. 이후 4차(1986년 12월), 5차(1987년 1월) 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음모 등에서도 B형 혈액형이 발견됨에 따라 진범 혈액형이 B형으로 좁혀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혈액형이 지금까지 B형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떤 경위로 확인됐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당시 조사 결과가 잘못됐을 가능성도 면밀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며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증거물 수집 과정 중 오류 발생 가능성을 높게 진단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증거물 수집 과정이나 검사할 때 시료가 오염될 수 있어 혈액형을 잘못 추정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범행 장소가 실외라면 오염 가능성이 높아 잘못 추정될 수도 있는데 이 사건은 논바닥 등 자연에 노출된 곳이 많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혈액형 오판으로 인해 추가 살인이나 장기 미제사건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혈액형은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여서 용의자를 추리는 데 결정적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경찰은 1988~1991년 화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10건을 조사하는 데 연인원 205만명에 달하는 경찰을 동원하고, 2만1280명을 수사했다. 지문 대조자도 4만116명에 이른다.
수사 과정에서 화성사건 일대에 거주해온 이씨는 경찰의 수사망을 빠져나가 충청북도 청주로 거주지를 바꿨다. 만일 혈액형 오판이 없었다면 사건 일대 주민이었던 이씨를 유력한 수사 대상에 올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씨는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 화성시 진안동)에서 태어나 20대 후반인 1990년대 초까지 살았다.
경찰은 당시 수사한 2만1280명 중 이씨가 포함됐는지에 대해 "(이씨가) 당시 수사선상에 올라 있었는지 여부는 수사 중이라 밝힐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혈액형 판단 분석 오류로 인해 유력 용의자가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아 미제사건으로 남았을 개연성이 있다"면서 "혈액형이 달라 B형이 아닌 사람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경찰의 오류와 잘못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청주지검은 1994년 이씨가 저지른 처제 강간 살인사건 수사 기록을 창고에서 발견해 경기남부경찰청에 사본 형태로 제공하기로 했다. 상세한 범행 동기와 수법, 평소 생활·정신 상태 등을 알 수 있어 화성사건과의 연관성을 따지는 데 유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화성 = 지홍구 기자 / 서울 = 박윤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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