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사진=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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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서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지난 9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 판결에 대해 대법원 측이 제공한 설명자료 중 일부분이다. 법원이 사건을 판단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이날 강제추행 등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유력 차기 대선 주자였던 안 전 지사가 성폭행 혐의를 받은 것만으로도 관심을 모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법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법원이 성범죄 등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보다 범위를 넓혀 말하면 성별 간의 차이로 인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차별과 유·불리함 또는 불균형을 인지하는 것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해 4월 대법원 판결에서 처음 언급됐다. 교수 A씨가 성희롱과 성추행을 이유로 해임당하자 해임이 잘못됐다며 제기한 소송에서였다. 이 사건에서 1심과 2심 법원은 피해 여학생들의 진술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A씨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사건을 뒤집고 다시 판단하라고 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면서 "성희롱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대법원은 또 "피해자가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가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신고를 권유한 것을 계기로 비로소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피해사실을 신고한 후에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그에 관한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 전 지사의 1·2심에서는 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논란이 뒤따랐다. 안 전 지사의 하급심이었던 1심과 2심 판결에서 판단이 달라진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 김지은 씨의 진술 신빙성 때문이었다. 안 전 지사 사건에는 객관적인 '물적 증거'의 수가 적었다. 따라서 김씨의 진술과 김씨로부터 피해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한 안 전 지사의 전임 수행비서 등의 진술 정도가 유력 증거로 꼽혔다. 이들의 진술 신빙성을 인정할 것이냐 배척할 것이냐가 유·무죄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1심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김씨의 진술 중 많은 것들이 2심에서는 인정됐다. 성인지 감수성을 2심 재판부가 1심 재판부 보다 폭넓게 적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 김씨의 진술 신빙성을 배척하면서 "김씨가 고학력에 성년을 훨씬 지나고 사회 경험도 상당한 사람"이라고 봤다. 또 범행이 발생한 당일 저녁 김씨가 안 전 지사와 와인바에 동행한 점 등을 들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김씨의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2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이 사소하게 일관성이 없거나 최초 단정했던 진술이 다소 불명확하게 바뀌는 부분이 있어도 그 신빙성에 대해 이유 없이 배척하면 안 된다"면서 김씨의 진술 신빙성을 인정, 안 전 지사에 대해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의 판결을 확정한 이번 대법원 판결은 결국 성인지 감수성을 폭넓게 해석하는 쪽을 더 옳다고 본 것으로 해석된다. 때문에 앞으로 일선 법원에서도 성인지 감수성 법리를 폭 넓게 적용, 성 범죄 가해자에 대한 엄벌 기조를 이어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성 범죄 관련 사건 판단 시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에는 법조계에서도 다수가 공감하는 분위기다. 신민영 변호사는 "피해자 보호에 진일보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성범죄 피해 이후 피해자가 통상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가해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피해자 답지 않은 행동이란 게 사실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최근 법원의 변화는 환영할만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성인지 감수성을 폭넓게 반영하는 것만큼 충분한 보완을 이뤄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박찬성 변호사(포항공대 자문위원)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지만 아직 다듬어져야 할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다"면서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썼을 때는 왜 이런 부분을 사실로 판단했는지, 왜 이런 부분을 사실로 판단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다른 재판에서 보다 더 상세하게 판결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채원 , 송민경(변호사) 기자 chae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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