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상파울루의 올드타운. 한때 커피 거래로 흥청거리던 이 거리는 남미 최대의 금융 허브가 되었다. 브라질의 행정 수도는 브라질리아지만,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는 상파울루다. 최상기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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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브라질로 가는 항공편을 검색해보면 100가지가 넘는 루트가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출발하는 직항 노선은 없다. 유럽의 각 나라를 경유하거나,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를 거쳐가는 루트, 그리고 반대로 태평양을 건너 북미나 멕시코로 돌아서 들어갈 수도 있다. 두 번, 세 번 경유하는 조건까지 찾다 보면 경우의 수는 곱절로 늘어난다. 그렇게 멀고도 먼 나라, 우리와는 지구 정 반대에 위치한 커피 대국, 브라질을 찾았다.
예정된 커피 농장 방문 일정이 늦춰지면서 이틀 가량 상파울루에서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준비되지 않은 여행자가 낯선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작정 시내를 배회하는 것일 뿐. 다행히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시티 투어 프로그램을 만나 친절한 가이드와 함께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며 이 도시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16세기 중반 예수회의 신부들이 풍토병을 피해 내륙 고원에 사도 바울의 이름을 따서 선교 취락을 세운 것이 도시의 시작이다. 당시 부의 원천이던 사탕수수 재배에도 적합하지 않아 상파울루는 수세기 동안 해안도시에서 오지로 가는 중간 기착지 정도에 불과했다. 이 작은 도시를 인구 1,100만명의 남미 최대 도시로 키운 것은 커피였다.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커피가 잉태됐다면 절정의 화려한 꽃을 피운 곳은 브라질 상파울루다. 커피의 고향 에티오피아에서 어떻게 브라질로 커피가 전해졌고, 왜 브라질은 오늘날 세계 최대의 커피 산지가 될 수 있었을까?
수십만 년 이상 에티오피아의 계곡에서 서식하던 커피나무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시점에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에 전해졌고, 오랫동안 이슬람의 차 문화로 정착됐다. 이후 십자군 전쟁과 지중해 무역을 통해 커피는 유럽에 전해졌으며, 18세기 초 유럽인들이 카리브해의 아이티와 수리남, 그리고 프랑스 해외 영토인 마르티니크 섬으로 커피 종자를 들여오면서 세계 커피의 중심이 중남미로 이동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그리고 1727년 브라질 인접국인 프랑스령 가이아나에서 씨앗을 몰래 들여와 심은 티피카 품종의 커피나무가 오늘날 커피 대국, 브라질의 커피 시대를 열었다.
수십 년 후, 또 다른 루트로 브라질에 커피가 들어왔다. 프랑스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옆에 있는 부르봉 섬(현재의 레위니옹 섬)에서 재배하던 커피로, 섬 이름을 따서 버본(부르봉) 종으로 불리우는 커피다. 이것이 브라질로 들어오면서 아라비카 커피의 2대 원류인 티피카와 버본 품종이 브라질에서 만나게 되고, 오늘날 이들의 후손과 이 두 가지 원종에서 나온 씨앗이 자연적, 또는 인위적인 교배와 변이를 일으키면서 다양한 향미의 변종들이 양산됐다.
그러나 이렇게 브라질에 처음 커피가 상륙한 이후 상파울루주의 고원에서 만개하는 데까지 100년의 세월이 걸렸다. 해발 약 800m의 널따란 고원지대. 연중 기온의 변화가 별로 없어 가장 추운 7월에도 섭씨 1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가장 더운 1월에도 30도를 넘지 않는다. 사시사철 온화하고 쾌적한 기후와 더불어 유기물이 풍부한 고원의 붉은 토양(테라 록사)은 상파울루를 커피 생산의 최적지로 만들었고, 커피 자본의 성장을 기반으로 상파울루는 남미 최대 도시가 됐다. (상파울루시는 상파울루주의 주도(州都)다.)
때마침 대서양 건너 유럽의 산업혁명과 19세기 초 미국 경제의 부흥은 급격한 커피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금광석을 나르기 위해 건설된 철도는 브라질 커피 산업의 동맥이 되었고, 상파울루시 남동쪽 50㎞ 지점에 개발된 산투스항은 세계 최대 커피 집산지이자, 남미를 대표하는 무역항이 됐다.
상파울루주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발전한 브라질 커피는 19세기 후반 유럽과 미국이라는 거대한 커피 시장을 지배하면서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르고, 상파울루는 세계 커피의 중심으로 발돋움한다. 현지인들이 콜로니얼 양식이라 부르는 유럽식 건물들과 그곳에 들어찬 은행과 상점,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상파울루 시민들의 모습에서 한 때 커피 산업의 부흥으로 흥청거렸을 도시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황금 낟알(Golden Bean)로 불리던 커피. 이 도시를 황금기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커피였으며, 도시의 많은 탐욕과 권력은 커피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작 브라질을 커피 대국으로 만든 주역은 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한 노예와 유럽의 가난한 이민자들이었다.
커피 수확 후 땅에 떨어진 열매를 줍기 위해 커피나무 아래 덤불을 긁어 모으는 작업자. 이런 거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흑인 또는 ‘아프로-라티노’라 불리는 혼혈들이다. 최상기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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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상파울루 구도심을 따라 이동했다. 다른 도시에 비해 유난히 눈에 띄는 홈리스들. 그들은 도심 곳곳에 모포와 낡은 배낭을 두른 채 드러누워 있었다. 대개 흑인이거나, ‘아프로-라티노’라고 불리우는 혼혈들이다.
도시 가이드는 많은 홈리스들이 브라질 이주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브라질은 노예 무역으로 가장 많은 아프리카 인들이 강제 이주한 나라다. 브라질 노예는 미국으로 보내진 노예의 10배가 넘는 500만명에 육박했다. 아울러 가장 늦게까지 노예무역이 허용되어 영국보다 80년이상 늦은 1888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됐다.
브라질 노예 이주사는 브라질 산업의 발전과 깊은 관계가 있다. 모잠비크나 앙골라 등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강제로 이송된 노예들이 처음 보내진 곳은 사탕수수 밭이었다. 다니엘 디포가 쓴 소설 ‘로빈슨 크루소’가 브라질 사탕수수 농장에서 필요한 노예를 구하러 가다가 조난당한 얘기일 정도로 당시의 노예무역은 매우 활발했다.
이후 브라질 중부의 미나스 제하이스주를 중심으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많은 노예들이 금광으로도 보내졌고, 19세기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커피 붐이 일면서 다수의 노예들은 커피 농장으로 흘러 들었다. 고원의 자연 삼림을 정리하고, 커피 묘목을 심고, 커피 열매를 수확하는 모든 고단한 노동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형 농장을 라티푼디움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2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기업형 플랜테이션 농장들은 대개 이런 노예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피부색에 대한 편견은 여전해 흑인은 육체노동을 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고착화됐다.
노예무역이 금지되면서 부족해진 일손을 메운 사람들은 유럽계 이민자들이었다. 1880년대부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등 유럽의 빈민들이 큰 꿈을 갖고 브라질로 몰려왔고, 당시 노동력이 부족했던 브라질 정부가 이들을 적극 수용하면서 400만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공유지를 불하 받지 못한 이민자들은 저임금을 받고 커피를 비롯한 대규모 농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으며, 농장의 험한 일을 견디지 못한 상당수 이민자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가난을 피해 먼 타지로 왔지만, 브라질 커피 농장에서의 노동은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힘든 또 하나의 굴레일 뿐이었다.
며칠 후 일정대로 브라질의 여러 대규모 커피 농장들을 방문했다. 예상대로 플랜테이션 농장주는 한결같이 백인인 반면, 농장에서 거친 일을 하고 있는 작업자들은 대개 흑인이거나, 토착 원주민, 그리고 이들 사이의 혼혈들이었다. 노예제는 오래 전에 폐지됐지만, 약 400만명의 토지 없는 농업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가난과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근ㆍ현대를 거쳐 발전한 서구의 대도시들이 대개 그렇듯 상파울루 또한 탐욕과 광기의 자본이 건설한 도시다. 상파울루가 다른 도시의 성장 배경과 다른 점은 탐욕의 중심에 커피가 있었고, 이를 위해 많은 노예와 이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은 과거의 역사일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진행중인 고통이며, 어쩌면 부와 신분의 대물림은 후대에도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어스름이 짙어지는 상파울루의 하늘은 먹을 것을 찾아 배회하는 홈리스들의 표정만큼 우울해 보였다.
최상기 커피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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