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연대기 ②] 명동촌 개척 지도자 규암 김약연
뚜렷한 항일 족적 남긴 독립운동가·교육가·목회자
시대를 초월한 유훈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통달한 유학자의 개종…북간도 기독교 역사 대변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① 나라 잃은 그들에게 '북간도'는 약속의 땅이었다 ② 1백년 전 만주서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운 한국인 <계속> |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 (사진=CBS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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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큰 깨우침을 전하는 강력한 단문이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제의 모진 탄압을 피해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 생의 마지막에 남긴 말이다. '간도 대통령'으로도 불린 그의 이름은 규암 김약연(1868~1942).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자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꼽히는 고 문동환(1921~2019) 목사는 지난해 5월 병상에 누운 채 가진 인터뷰에서 "내가 일곱 살 때 목사가 되려고 결정을 했다"며 "(어른들이) '너 커서 뭐가 될래?' 하고 물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김약연 목사였다"고 회고했다.
북간도 출신인 문 목사는 "'목사가 어떤 일 하는 것이지?' 생각해 보니 김약연 목사는 목사인 동시에 교사요, 만주 일대 한국인의 지도자였다"며 "목사가 되겠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김약연처럼) 살고 싶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고 부연했다.
당대 항일 거점으로 우뚝선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김약연으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암은 북간도 한인 사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목회자였다. 그는 1899년 항일 독립운동 뜻을 모은 동지들과 함께 북간도 장재촌에 집단 이주한 뒤 그곳 황무지를 개간해 명동촌을 개척했다. 이후 근대 교육을 표방한 명동학교와 항일운동 거점 역할을 담당한 한인자치기구 간민교육회를 세우는 등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흥미로운 점은 김약연이 일찍이 맹자를 1만 번이나 읽었을 만큼 통달한 유학자였다는 데 있다. 당연히 교육 역시 유학을 중심으로 펼쳤을 법한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까지는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서굉일 한신대학교 명예교수는 이를 두고 "(김약연으로서는) '유학 갖고는 근대교육을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세상은 변하고 일제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근대 과학과 새로운 시대의 기술을 갖고 침략을 해오는데, 전통적인 유학을 갖고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던 것)"라고 설명했다.
◇ 경제·문화 역량 키우기 주력…근대식 학교·병원·교회 '항일 거점'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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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기독교가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데는 캐나다 선교부 역할도 적지 않았다. 당시 함경남북도·북간도 일대 선교를 관할하던 캐나다 선교부는 북간도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던 기독교인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당대 북간도 용정에는 서구 도시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지역이 있었다. 바로 조계지(외국인 거주 지역으로 설정된 땅)였다.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산 이곳을 북간도 사람들은 '영국더기'라고 불렀다.
북간도 '영국더기'는 김약연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캐나다 선교부에 보낸 청원서를 통해 아래와 같이 요청했다.
'북간도 조선 백성 200만여 명 중 교회는 40여 개, 교인은 1600~1700명입니다. 구역을 4개로 나누어 각각 목사와 남녀 전도인 한 사람씩 있어야 목자 잃은 어린 양 같은 백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파견해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북간도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창병원' 역시 캐나다 조계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들도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었다. 조계지에는 일본군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약연의 청원으로 선교사들이 오면서 서양식 병원을 비롯해 학교, 교회 등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북간도 용정은 경제적·문화적으로 새로운 힘을 키워나갔고, 항일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성장했다.
◇ '민족+기독교' 교육으로 키운 후대…항일독립·민주화 운동 일꾼 성장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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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으로 대표되는 북간도 기독교 역사는 1888년 창립된 서울 중구 상동교회에 뿌리를 뒀다. 상동교회 역사는 한국 기독교 역사이자 독립운동사와 다름없다.
이는 상동교회 청년회 명단을 통해 단적으로 확인되는데, 여기에는 주시경, 남궁억, 이동녕, 이회영, 이승만, 김구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는 "북간도 지역을 개척했던 분들 가운데 초창기 분들이 상동교회 전덕기(1875~1914) 목사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 많다"며 "전덕기 목사의 지론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백성들을 잘 섬기는 거다' '나라가 잘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올바른 신앙'이라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주 공동체인 북간도에 기독교가 전해지는 과정 역시 드라마틱했다.
당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동휘(1973~1935)는 일제가 조선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1910년 전후 북간도 일대를 찾아 기독교 전도와 교육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그 영향으로 김약연 등 명동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집단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명동촌 지도자들은 명동학교 등을 세워 민족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했다. 이를 통해 배출된 많은 인물들이 이후 독립운동과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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