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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기자칼럼]류현진과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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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수나 운동 선수가 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거나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 국내 언론이 반드시 쓰는 기사가 이른바 ‘외신 반응’이다. 미국·유럽 등의 언론이 이 뛰어난 한국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현지 기사를 찾아내 우리말로 풀어 소개하는 것이다.

경향신문

외신의 평가를 기사로 작성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거둔 성공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다각도로 조명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기사는 동북아시아 변방 국가 특유의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남남이지만 같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자랑스러워지는 것이다.

김연아는 기자들에게 수많은 외신 반응 기사를 쓰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힘차고 아름다운 연기로 피겨 스케이팅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김연아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에게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을 때였다. 김연아는 의연하게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를 응원했던 한국 팬들은 판정이 불공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팬들의 분노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이 현상에 대한 외신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김연아가 은메달에 그쳤을 때 한국인들이 분노한 것은 놀랍지 않다”며 “오랜 세월 한국은 국제 대회 성적을 자부심과 결부했던 나라”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이 전쟁의 폐허와 가난을 딛고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자국을 ‘약소국’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OECD 경제 순위나 국제 스포츠 대회 성적, 노벨상 개수 등 정량화할 수 있는 성과가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는 걸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김연아의 은메달이 불러온 분노의 후폭풍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를 갈구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서구 언론에 드러내 보인 사건이 됐다.

그러나 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을 응원하는 마음들을 모두 애국심이나 자격지심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뛰는 한국인 운동 선수를 국가대항전에 출전한 국가대표 선수인 양 편파 중계하는 방송에 눈살을 찌푸리는 팬들도 많다. 사회가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인들의 해외 활약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리라.

최근 기자들에게 외신 반응을 쓰게 만든 스타는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의 류현진이다. 올 시즌 류현진은 뛰어난 투구로 메이저리그 최정상에 오르며,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 수상 후보로까지 거론돼 왔다. 한국 야구팬들에게 친숙한 얼굴인 류현진의 활약은 반가운 일이다. 류현진의 경기 내용을 소개한 기사에서 악성 댓글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팬들은 류현진이 외국에서 ‘국위’를 ‘선양’했기 때문에 응원한 게 아니다. 류현진을 덮어놓고 칭송하는 댓글엔 ‘국뽕(애국심에 도취된 것)’이라는 빈정거림이 따라붙는다. 팬들이 류현진에게 원하는 것은 국위선양보다 차라리 ‘힐링’에 가깝다.

우리는 삶에 짓눌려 항상 피곤하고, 별다른 낙이 없다. 정치권엔 믿을 사람이 없고, 경제는 언제 좋아질 것인지 기약이 없다. 웃을 일 없는 사람들에게 류현진은 정교한 투구를 지켜보고 감탄하는 즐거움과 승리의 기쁨을 안겨준다. 경기에 몰입하는 동안은 걱정과 잡념을 잊을 수 있다. 적잖은 팬들이 “요즘 류현진 보는 맛에 산다”고 고백하는 이유다.

류현진은 최근 몇 경기에서 부진했다. 사이영상을 받는다면 개인의 영광이자 한국인의 메이저리그 도전사에 한 획을 긋겠지만, 사이영상을 못 받아도 실패는 아니다. 남은 경기에서 잘 던진다면 한국 팬들은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즐기려 보는 게 스포츠 아니겠는가.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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