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젠더와 섹슈얼리티, 과거 역사와 겹쳐 읽기 시도한 드문 책
페미니스트 타임워프
김신현경·김주희·박차민정 지음/반비·1만7000원
최근 3~4년 동안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 속에 관련 책들이 유례없이 다양하게 발간되고 있지만 페미니즘의 눈으로 한국 사회를 깊이 있게 분석한 책은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페미니즘의 문제라기보다 사회과학 출판 전반이 처한 무기력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젠더 이슈가 워낙 날카롭게 대립하며 다양해지기도 했거니와 담론장 자체가 극도로 예민해진 까닭도 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 타임워프>는 그렇게 뜨겁고 농도 짙은 ‘지금 여기’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과거 역사와 겹쳐 읽기를 시도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버닝썬 게이트까지, 군형법 제92조의 6 ‘계간’(2013년 개정에서 ‘항문성교’로 표현만 바뀜)과 ‘동성애 반대’ 문제, 고 장자연 사건과 10·26, 케이티엑스(KTX) 승무원 투쟁과 미러링, 유영철 연쇄살인사건과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2002년 ‘여성 대통령 논쟁’과 박근혜 탄핵 정국 등 한국 사회를 강타한 ‘사건’들을 병치해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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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세 명의 지은이들은 연예산업, 성매매, 섹슈얼리티 연구를 지속하며 한국 근현대 사회를 면밀히 분석해왔다. 김신현경 독일 베를린자유대 박사후연구원은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 같은 예전 사건들은 왜 지금 참조점이 되지 못하는지 얘기를 나누다가 역사를 재해석, 재구성해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전에 여성들을 연쇄 살해한 유영철 사건이 벌어졌죠. 고 장자연 사건 이전에 여성 연예인들을 연회에 동석시킨 10·26도 있었고 그 배경에는 여성 연예인의 성을 매개로 한 정치·경제·언론의 남성동맹이 있습니다. 그때와 지금, 여성은 어디에 어떻게 같고도 다르게 배치되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죠.”
국가나 기업에 큰 행사가 있어 손님을 초대, 환대, 접대하는 일이 벌어질 때 여성의 ‘자리’는 어디였던가? 룸살롱, 강남 클럽, 성매매 집결지, 화장실, <부산행> 케이티엑스…. 곳곳에 정신 잃은 여성들이 살아 있는 시체(living dead)로, 좀비로, 토막난 사체로 등장한다. 성폭력, 성매매, 비정규직 문제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여성 피해자들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받기 일쑤였다.
김주희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정희진 선생이 ‘죽어야 사는 여성인권’이라고도 했지만, 이 책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여자들의 말이 거짓’이라는 여성혐오적인 연상에 대항하고자 페미니스트 개입을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성매매 업소에서는 아무리 후미진 골목이라도 ‘여자들만 있으면 장사가 된다’고 합니다. 관광책자에 요정과 성매매 집결지를 표시해 손님들이 찾을 만한 국가라는 것을 과시하듯 보여주었고요. 지금도 룸살롱, 클럽에서 투자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여자들의 몸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김주희)
퀴어한 존재들에 대한 담론 형성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보여준 <조선의 퀴어>(2018)로 호평을 받은 박차민정 이화여대·명지대 강사는 이번에도 믿기 힘든 과거의 사건들을 찾아냈다. 1968년 임신 7개월 때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받다 죽은 뒤 암매장 당했다가 다시 파헤쳐져 사지가 절단된 채 시신이 유기되었던 19살 여성, 같은 시기 선진국으로 원정 인공 임신중절 여행을 떠났던 여성, 1970년대 피임조차 강력히 반대하는 가톨릭 교계의 가르침에 반발했던 한국 여성 신도 등이다.
“1960~70년대 한국에선 서구에 견줄 만한 여성운동이 없었다고들 하지만 사실 한국 여성들의 저항이 없던 게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되지 않았던 것뿐이죠. 그 시대에 이미 트랜스내셔널한 정보 습득과 이동이 있었고 여성 일상사에도 엄청난 변화와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박차민정)
그동안 글들은 수없이 고쳐졌다고 한다. 글을 쓰는 가운데 ‘버닝썬’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되었으며, 케이티엑스 여승무원들이 복직하고,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도 ‘촛불과 페미니즘의 시간’ 속에 이뤄졌다. 그래서 마지막은 ‘다시, 박근혜를 ‘사유’해야 한다’는 글로 맺었다.
“지금의 젠더/섹슈얼리티 장면들의 기원으로서 개발독재 시대에 대한 면밀한 페미니스트 독해가 필요하다”며 이들은 “책이 다룬 사건을 읽으며 독자들이 각자의 경험에서 기억을 재해석하는 계기로 활용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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