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집안일 전담하는 전통 남아…사회 참여 걸림돌
급식 도입하는 주 점차 증가하고 있어
스위스 제네바의 한 초등학교 © 김지아 통신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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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뉴스1) 김지아 통신원 = 8월 마지막 주 월요일부터 스위스 제네바 공립 학교들은 일제히 새 학기를 맞이했다. 방학 내내 조용하던 동네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다. 특히 초등학교 근처에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 부모들로 붐빈다. 그런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해야 할 점심 시간에 학교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왜일까.
1학년부터 8학년까지 있는 제네바의 공립초등학교 등교 시간은 1~2학년은 오전 8시45분, 그 이상은 오전 8시까지. 하교 시간은 오후 4시다. 그런데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2시간 동안 스위스의 학교는 문을 닫는다. 점심 시간이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초등학생들이 점심 시간에 집으로 와서 식사를 한다. 저학년 아이의 경우 보호자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 중이든 오전 11시30분에는 학교 앞으로 마중을 가야한다. 보호자가 없으면 선생님은 아이를 절대 혼자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보호자와 함께 2시간 동안 점심 식사와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 1시30분에 다시 학교로 간다. 등하교 시간까지 포함하면 보호자는 총 4번 학교에 왔다 갔다해야 하는 것이다. 집에서 엄마가 한 음식을 먹으니 위생과 영양에 대한 걱정 없이 점심을 즐길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도움없이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경우는 쉽지 않다.
2~3시간 간격으로 아이를 데려다주고 오기를 반복해야 하는 이런 시스템 때문에 스위스에서 부모가 둘 다 직장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조부모나 베이비시터를 동원하여 곡예를 부리듯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도 있지만, 실제론 주로 엄마가 직장을 포기하고 육아에 전념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전통적으로 아빠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는 것 문화가 보편적이었던 영향이 있을 것이다.
스위스는 아랍권 국가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여성 참정권을 가장 늦게 인정받은 나라다. 1971년에 와서야 국민투표를 통해 여성도 참정권을 갖게 되었는데, 전통색이 강한 시골 지역에서는 그나마 1990년이 되어서야 이를 인정했다. 그런 이유로 지난 2018년 스위스는 경제 상위 국가들 중에서 성불평등지수 1위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스위스 초등학생의 점심 식사 전통이 왜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짐작하게 하는 사실들이다.
연방국가인 스위스는 각 칸톤(州)의 자치권이 강해 학교 행정 시스템도 칸톤 별로 다르다. 바젤이나 제네바 같은 도시의 경우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다. 제네바 칸톤은 점심 식사와 방과후 돌봄 교실을 'GIAP'(Groupement Intercommunal Pour L’animation Parascolaire)라는 기관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한다.
담임 선생님은 정해진 시간에 담당자에게 아이들을 인계하고 점심 시간과 방과 후 돌봄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이 기관에 맡긴다. 조건 없이 누구나 신청할 수 있지만 비용이 문제다. 각 가정의 소득 수준과 자녀 수에 따라 할인이 되기도 하지만 중산층의 평균 임금 기준으로 하면 하루에 약50프랑(약6만원)씩 지출해야 한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상황은 더 열악해진다. 맞벌이 부부만 신청이 가능하거나 이마저도 정원이 금방 다 차는 바람에 신청을 못할 수도 있다. 집에 엄마가 없어서 밥을 못해주는 아이는 불쌍한 아이라는 인식이 남아있어서 이 기관의 이용을 꺼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현실은 결국 스위스 여성의 일자리 관련 통계로 나타난다. 스위스에서 여성이 받는 임금은 남성보다 평균 20% 적고, 연금도 남성보다 37%가량 덜 받는다. 주로 여성이 육아에 전념하느라 휴직이나 퇴직 등을 하기 때문에 남성보다 근무 연수가 적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꾸준히 여성 불평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육아 독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여성의 권리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정서적 스트레스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점심 식사를 위해 외부로 이동해야 하고 돌봐주는 이가 자주 변동하는 일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최근 취리히 칸톤에서는 이런 문제점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2018년 총 7개의 학교가 학교 급식을 시범운영했다. 앞으로 2025년까지 취리히의 모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교내 급식이 이뤄질 예정이다.
취리히 외에도 수도 베른 등 학교 급식을 시행하는 지역들이 몇몇 더 있다. 스위스의 여성 참정권이 1971년에 연방 수준에서 인정되었지만 모든 지역에 적용되기까지 세월이 걸린 것처럼 여성의 사회 활동을 막는 스위스 초등학교 점심 식사 전통도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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