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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간도협약 110주년을 맞아 호시우보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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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간도협약 100주년을 맞는 2009년 9월 4일 서울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 앞에서 '간도 영유권 회복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청국(중국)과 일본 간 협약이 된 소문이 낭자하니, 더 사나운 호랑이의 태도를 가지고 사방을 엿보는 구미 열강국이 어찌 이 시대에 이익이 모인 만주 천지에서 아라사(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만 마음대로 뛰놀게 맡겨두며, 또 어찌 동방의 조그마한 섬나라 일본의 활갯짓을 앉아서 보리오."

1910년 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 신채호가 쓴 사설 '만주와 일본'의 한 대목이다. 청국과 일본 간 협약은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청의 흠명외무부상서 양돈언(梁敦彦)과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가 서명한 '간도에 관한 일·청 간 협약'을 말한다. 오는 4일은 간도협약 체결 110주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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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며 외교관으로 활약한 미국인 윌리엄스 웰스가 1884년 뉴욕에서 발간한 중국 지도. 굵은 빨강 선으로 국경선을 그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간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간도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접한 중국 만주 남부 지역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을 경계로 서간도와 동간도(북간도)로 나뉘는데 간도라고 하면 보통 동간도를 일컫는다. 간도협약에서 획정한 지역도 동간도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이곳을 왕업(王業)이 시작된 신성한 용흥지지(龍興之地)로 여겨 자국인이나 조선인 모두 드나들지 못하도록 봉금(封禁)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청 사이의 섬과 같은 땅이란 뜻에서 간도(間島)란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는 조선 농민들이 새로 개간한 땅이란 의미로 간도(墾島)라고 표기했으며, 조선의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 간방(艮方)에 있는 지역이라며 간도(艮島)라고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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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합의해 세운 백두산정계비. 1910년대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정성길 씨 제공]



이곳을 두고 조선과 청의 충돌이 끊이지 않자 숙종과 강희제가 관원들을 파견해 함께 이 일대를 답사하도록 한 뒤 1712년 백두산 정상 동남쪽 4㎞ 지점 분수령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비석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는 문구를 새겨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국경선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조선 농민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국경 분쟁이 재연됐다. 조선은 "토문강은 송화강의 상류"라고 주장하고 청은 "토문강은 두만강의 다른 이름"이라고 반박했다. 청의 조선인 추방령에 맞서 조선의 뒤를 이은 대한제국은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해 관할권을 행사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도 고종의 요청에 따라 1907년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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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팔도지도(都城八道之圖) 함경북도 편. 간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고 토문강과 두만강을 다른 강으로 그려놓았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청과 협상을 벌인 일본은 처음에는 대한제국의 입장을 따르다가 태도를 바꿔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탄광 채굴권 등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간도를 정나라 영토로 인정하는 협약을 맺었다. 간도파출소 관원도 철수하고 영사관을 설치했다. 이로써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강역이자 조선 농민들의 터전이던 간도가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간도협약은 국제법상 문제가 있다. 을사늑약은 일제가 대신들을 총칼로 위협해 체결한 데다 고종이 비준하지 않아 무효라는 게 정설이다. 설혹 당시 현실을 인정한다 해도 을사보호조약이 피보호국의 영토 처분권까지 보호국에 넘긴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다수 학자의 해석이다. 1952년 4월 일본과 대만(중화민국)이 맺은 조약에서도 "1941년 12월 9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협약을 무효로 한다"고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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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간도 주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자 작성한 '간도거민 호수간토성책'(間島居民戶數墾土成冊). 당시 대한제국이 간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간도협약 이듬해 한일 강제합병이 이뤄지자 간도로 향하는 한인의 행렬은 더욱 늘어났다. 일제의 수탈과 착취를 피해 두만강을 건넌 농민에다가 국권을 되찾으려는 애국지사들도 가세했다. 한동안 이 일대는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불리다가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하며 항일투쟁의 중심은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2차대전이 끝난 뒤 간도의 한인 중 일부는 귀향하고 남은 사람 다수가 모국 편입을 희망했다고 한다. 대만 외교문서에 따르면 제2차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8년 소련은 간도를 북한에 귀속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중공(중국)이 참전하며 간도의 귀속 문제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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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4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김영기 대표를 비롯한 민족회의 회원들이 중국 정부에 간도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분단으로 인해 간도는 우리에게 잊힌 땅이 됐다가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왕래가 재개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됐다. 특히 2009년에는 각계에서 간도 영유권을 회복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2002년부터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며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간도협약 체결 100주년을 맞아 불붙은 것이다.

"한 국가가 영토를 점유한 지 100년이 지나면 영유권이 인정되므로 9월 4일 이전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급속히 유포된 것도 기름을 부었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사법재판소에는 간도가 한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탄원서가 제출되고 국회에는 간도협약 무효 결의안이 상정됐다. 시민단체와 종교단체 등을 중심으로 '간도 영유권 회복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는가 하면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 회원들도 간도 알리기에 나섰다. 관련 학술 발표와 전시회 등도 활발하게 열렸다. 2005년 간도되찾기운동본부가 제정해 5회째를 맞는 간도의 날(9월 4일)에는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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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 3개 특수목적고 반크 동아리 학생들이 간도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간도 찾기 캠페인'을 2009년 8월 15일 해운대 센텀시티에서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로부터 10년 후, 간도는 다시 우리에게 잊혀가고 있다. 간도의 역사를 연구하고 홍보하는 움직임도 시들해졌고, 간도 영유권을 자의적으로 대륙 진출 이권과 맞바꾼 일제의 횡포도 이미 지난 일로 굳어지는 듯하다. 더욱이 한민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동포(조선족)가 하나둘씩 중국의 대도시와 한국 등지로 떠나는 바람에 간도는 공동화 현상을 빚거나 한족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당장 간도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것은 중국과의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고 남북이 분단된 상태여서 한계도 있다. 그러나 간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한껏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분위기를 보며 최근의 한일 간 무역 갈등에 따른 감정도 조변석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격랑이 휘몰아치는 한반도 주변 정세 속에서 역사를 잊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를 향해 호시우보(虎視牛步)하는 태도가 아쉽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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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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