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40)
제주도에서 '이공본풀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신화가 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할락궁이와 그 뒤에서 홀로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 원강아미가 등장한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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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화에 '이공본풀이'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자료가 있다. 제주도에서 전해지는 서사무가인데, 큰굿 때에 초공맞이 다음의 제차에서 구연이 되고, 불도맞이 때에도 불린다. 아동용 그림책으로도 많은 종류가 발간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서사무가들이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참으로 만만치 않다. 우선 간략하게 간추린 줄거리부터 소개해 본다.
할락궁이는 아버지 사라도령과 어머니 원강아미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서천꽃밭을 향해 여행하던 중 천년장자 집에서 태어났다. 사라도령은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고, 임신 중에 길을 따라나섰던 원강아미는 더 이상 긴 여정을 견디지 못해 천년장자 집에 몸을 의탁한 상태였다. 사라도령 없이 홀로 천년장자 집에서 할락궁이를 낳고 키우던 원강아미에게 진짜 시련은 천년장자에게서 비롯되었다.
천년장자는 원강아미와 할락궁이에게 모질게 일을 시키면서 끊임없이 원강아미를 탐하였다. 온갖 핑계를 대며 위기를 모면하던 원강아미는, 할락궁이가 진짜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오자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사라도령이 남긴 증표를 건네주며 서천꽃밭으로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할락궁이를 뒤쫓다 실패한 천년장자는 원강아미를 모질게 고문하다 죽여버렸다.
서천꽃밭에 도착한 할락궁이는 아버지 사라도령을 만나 아들임을 확인받고, 서천꽃밭의 물빛이 변한 것을 통해 어머니 원강아미가 목숨을 잃었음을 알게 되었다. 할락궁이는 서천꽃밭에서 사라도령으로부터 환생꽃과 수레멸망악심꽃을 받아와 수레멸망악심꽃으로 천년장자 일가를 몰살하고 환생꽃으로 원강아미를 살려낸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천꽃밭 꽃감관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원강아미는 저승어멍, 사라도령은 저승아방이 되었으며, 그 법으로 이 세상에는 할아버지 살던 곳에 아버지가 살고 아버지 살던 곳을 아들이 물려받아서 대대손손 이어가게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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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속 감정의 꽃밭을 상징하는 서천꽃밭
우리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서촌꽃밭'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점 쯤에 있는 곳이다. 어린 나이에 이승을 떠나게 된 아이들이 꽃을 가꾸고 있으며, 이곳을 관장하는 직함은 '꽃감관'이다. [사진 pxhe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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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상징으로 채워져 있기에,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이 지면에 다 담기에는 벅찬 내용이어서 간략한 줄거리만 적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전체 내용이 잘 갈무리된 책을 찾아 이야기를 제대로 감상부터 해보시길 권한다.
서천꽃밭은 우리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이다. 서천서역국 가는 길 어디쯤 있을 것으로 상상이 되는, 이승의 공간은 아니지만, 완전히 저승 안에 박혀 있는 공간도 아닌 경계 지점쯤에 있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이곳에서는 어린 나이에 이승을 떠나게 된 아이들이 꽃을 가꾸고 있으며, 이곳을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직함이 꽃감관이다.
우리 신화에 또한 흔히 등장하는 것이 환생꽃이다.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 등으로 각각 기능을 갖춘 명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죽은 사람에게 이 꽃들을 대고 문지르면 살이 돋고 피가 돌며 숨이 트인다고 한다. 많이들 알고 있듯 '바리데기'에서 바리데기가 이미 관에 실려 들려 나가던 오구 대왕을 살려낼 때도 쓰였다.
그런데 서천꽃밭에는 환생꽃과 함께 웃음웃을꽃, 울음울을꽃, 수레멸망악심꽃 등도 존재한다. 할락궁이는 이들 꽃을 가지고 가서 천년장자 식구들이 웃다, 울다 지치게 하였고, 서로 싸우다 결국 모두 죽어 멸망하게 하였다. 이승이 아닌 어딘가에 꽃밭이 있다고 상상하면 뭔가 환상적이고 극강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곳일 것처럼 생각될 텐데, 여기엔 죽은 생명도 살려내는 환생꽃도 있지만, 그와 함께 멸망꽃도 존재한다.
신화 속 공간은 인간과 인간 삶의 어떤 부분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서천꽃밭이라는 환상 공간에 환생꽃과 멸망꽃이 공존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세상사 모든 이치를 어느 한쪽 면에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생각하게 된다. 내 마음속에 꽃밭이 있다고 하면 이 꽃밭에는 미소지을꽃, 사랑주는꽃, 행복꽃이 만발할 지, 원망할꽃, 미워할꽃, 분노할꽃들이 가득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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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락궁이의 대 잇기, 그러나 결국 원강아미의 복수
이 이야기는 영웅 서사구조로 본다면 할락궁이라는 소년이 고초를 겪다가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고 혼자 찾아 나서 아버지의 아들임을 인정받고, 어려운 일을 해결한 뒤 신으로 좌정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 어머니를 죽게 한 상대에 대한 처절한 복수가 곁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던 초기에는 할락궁이의 분노와 복수에 관심을 가졌었고, 그래서 수강생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그런 구조를 우선 접하게 하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초점은 자연스럽게 원강아미에게 맞추어졌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어 본 경험을 해본 이들은 누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원강아미에게 접속하는 것이다.
이공본풀이 신화는 할락궁이라는 소년이 고초를 겪다가 어려운 일을 해결한 뒤 신으로 좌정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그 가운데에 어머니를 죽게 한 상대에 대한 처절한 복수가 곁들여져 있다. [사진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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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도령이 뜬금없이 서천꽃밭으로 불려가게 되었을 때 원강아미는 임신한 몸으로도 그를 쫓아갔을까. 그러다 더는 함께하지 못하고 천년장자 집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그 선택은 잘한 것일까. 천년장자가 끊임없이 탐하며 몸허락을 요구할 때 차라리 거기에 응해 주었다면 부잣집에서 편하게 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원강아미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 서사를 새로 구성해 보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장면들에서 원강아미가 한 선택들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대체 왜 그랬을까.
아버지의 법을 아들이 물려받게 된 내력을 풀이하는 이야기에 원강아미의 처절한 한이 배어 있다. 원강아미의 몸이 갈가리 찢겨 들판에 버려지는 일을 당하고서야 할락궁이의 아버지 찾기가 완성되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원강아미만 너무 지독하게 피해를 본다는 점에 분개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게 원강아미의 힘, 위대함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다른 이야기들도 그렇겠지만, 한국신화는 특히 삶과 죽음, 출산과 양육, 배반과 복수 등등의 경험치들이 쌓인 중년 이상의 성인들이 한 번쯤 접해볼 필요가 있다. 지나온 삶의 의미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인간관계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옛이야기를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려고 할 때 가장 힘든 점 중 하나가 역사적 배경을 따지고 현대의 현실 논리를 들이댈 때임을 밝힌 적 있다. 그런 것들에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이야기 속의 논리와 사유에 몰입하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만, 대부분의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그런 저항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옛 시대에 탄생하여 여태까지 살아남은 이야기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가부장 사회의 엄중한 윤리가 담겨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것 또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지금 현대사회라고 해서 가부장 질서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생활방식과 세상이 달라졌다는 인식 때문에 흐려져 있을 뿐, 아직 한국 사회는 가부장 질서의 견고함과 우직함 때문에 상처받는 이들이 존재한다. 가부장 질서라는 게 비단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또한 힘주어 말하고 싶지만 장황해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잠시 입을 다문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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