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1)
어머니가 오랜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와 동거를 시작했다. 팔순을 넘어서며 체력과 인지능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아버지를 보며 ‘이 평화로운 동거가 언젠가 깨지겠지’ 하는 불안을 느낀다. 그 마음을 감춘 채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버지에게 얹혀살고 있다”고 말하는 40대 비혼여성의 속깊은 동거일기. <편집자>
해외출장을 떠나는 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사진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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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 올 때까지 기다리실래요. 아니면 오늘 가시겠습니까?”
“… 하늘나라로 가… 고… 싶어요….”
2009년 3월 2일, 밤 11시 30분, 엄마가 세상을 떠나던 순간 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아픈 엄마를 두고 해외 출장 가는 마음이 무거웠다. 주치의 선생님은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아도 일주일 이상은 충분히 계실 거라 하셨고(그 말이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더는 없다는 뜻이란 걸 난 알지 못했다) 엄마는 ‘네가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다녀오라 하셨다. 그 말에 믿고 떠났는데, 비행기가 목적지에 닿기도 전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8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5년 아버지 팔순을 맞아 가족 책을 발간하고 조촐한 행사를 가졌다. 그 자리에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해 주셨던 목사님도 초청 드렸다. 식사를 마치고 감사 인사를 드리던 중 목사님이 내 귀에 대고 말씀하셨다.
“공항에서 어머니와 통화했었죠? 그때 제가 옆에 있었어요. 전화 끊으신 뒤 제가 어머니에게 물었어요. ‘따님이 일주일 뒤에 온다는데, 그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오늘 가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어머니가 ‘가겠다’고 하셨어요.”
그렇다. 8년 전 그 날, 비행기 이륙 직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짐도 부치고 수속도 마쳤으면서 엄마가 돌아오라고 하면 바로 달려갈 것처럼 종알댔다.
“엄마, 제가 올 때까지 잘 견디고 계셔요. 일 잘 마치고 빨리 돌아올게요.”
엄마의 대답은 의외였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니?”
전날 저녁,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 했던 엄마였는데, 엄마답지 않은 반응이 이상했지만, ‘통증이 견디기 힘드셔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로부터 10시간 뒤, 비행기가 호주 멜버른공항에 착륙하자 나는 휴대폰 전원을 켰다. 안테나가 서자마저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렸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언니였다.
공항에 도착해서 들은 소식은 엄마가 떠나셨다는 말이었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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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어제…….”
순간 멍했다. 이건 아닌데, 엄마가 나를 두고, 내가 오기도 전에 가실 리 없는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머리를 벽에 찍었다. 느낌이 이상할 때 바로 멈춰야 했다. 아픈 엄마를 두고 내 일만 챙겼다는 자책은 가슴에 큰 상처로 남았다.
“하늘나라로 가시겠다고 했어요.”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목사님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메아리처럼 머리에서 울리며 물음표를 만들었다. 목사님은 왜 엄마에게 그걸 물었고 엄마는 왜 날 기다리지 않고 가겠다 하셨을까? 엄마가 가겠다 하면 바로 갈 수 있는 건가? 내 모든 신경세포와 기억이 8년 전 그때로 돌아가 묻고 또 묻고 있었다. 다음 날 목사님을 다시 찾아갔다.
“목사님, 저는 그때 엄마한테 언제 떠나시겠느냐고 왜 물어보셨는지 궁금해요.”
왕복 4시간을 달려가 만난 목사님에게 밑도 끝도 없이 여쭈었다. 목사님 때문에 엄마가 빨리 가신 게 아니냐는 원망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하나님 곁으로 갈 준비가 다 되어 있었어요. 때가 이른 것이 제 눈에 보였어요.”
당시 나와 통화를 끝낸 뒤 엄마는 세 가지 부탁을 하셨다고 한다. 첫째, 병원에서 그만 나가게 해주세요. 둘째, 제가 떠난 뒤 각막을 기증해 주세요. 셋째, 찬양 드리며 주님 곁으로 갈 수 있게 해주세요.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세상과 이별할 준비가 다 되었다고 판단하셨다 한다. 그 길로 교회에 돌아가 급한 일 처리하고 늦은 밤 엄마가 입원한 병원으로 돌아오셨는데, 며칠째 아무것도 드시지 못한 엄마는 목사님을 보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켜 무릎까지 꿇으셨다 한다.
함께 있던 언니와 찬양을 시작했다. 엄마 입이 말라 언니가 거즈에 물을 묻혀 입술을 적셔드렸는데, 그걸 어찌나 맛있게 쪽쪽 빨아 드시는지 거즈까지 삼킬까 봐 얼른 입에서 떼어낼 정도였다 한다. 그 후 한 시간가량 더 찬송가를 부른 뒤 혼자 세면장에 들어가 양치질하고 변을 보신 뒤 샤워까지 마치셨다 한다.
엄마는 인위적 심폐소생술을 받지 않겠다는 사전 임종 서약을 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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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쓰러지실까 문밖에서 부축하려 기다리는 언니를 “괜찮다” 뿌리치고 혼자 힘으로 침대에 오르시는 순간, 엄마 몸이 뒤로 확 젖혀졌다. 언니는 엄마를 붙잡아 침대에 누인 뒤 비상벨을 눌렀다. 간호사가 뛰어들어와 동공과 맥박을 확인했다. 인위적인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는 사전 임종 서약을 한 터라 그것이 어머니의 임종이 되었다.
“목사님은 그때를 어떻게 아셨어요?”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였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살아생전 다른 이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 남에게 신세 지거나 피해 주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했다. 투병 중에도 살림은 물론이고 손주들도 다 키웠다. 유방에서 시작된 암은 뼈와 갑상샘을 거쳐 폐까지 전이됐고, 마지막 폐암 수술 후에는 극심한 후유증과 통증으로 고생했다.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잠들지 못하고 스스로 먹지 못하는 날이 계속됐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된 엄마의 암 투병은 무려 26년간 지속했지만, 이별의 순간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호하고 짧았다. 남은 이들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극복하는 숙제가 주어졌을 뿐.
장례 절차를 마친 뒤 지방에 사는 언니들은 떠나고 아버지와 나 단둘이 남았다. 나는 출장 가방은 던져 놓고 냉장고 문부터 부여잡았다. 집에서 거의 밥을 먹지 않은 탓에 참으로 오랜만에 열어본 냉장고였다. 엄마도 병원에 오래 계셔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내일부터 어떻게, 뭘 먹고 사나? 나 출근하면 아빠는?’
그렇게 아버지와의 대책 없는 동거가 시작됐다.
푸르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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