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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TF사진관] '일제 잔재? 역사적 가치?'…적산가옥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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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의 경제보복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불매운동과 더불어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일제의 잔재 청산, 그 중에서도 적산가옥이다. 일본 마을을 보는 듯한 이 거리는 서울 후암동의 한 골목길이다. /이선화·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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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이선화·이덕인 기자] 일본의 경제보복이 장기화되고 있는 최근, 불매운동과 더불어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일제의 잔재 청산, 그 중에서도 적산가옥이다.

적산가옥이란 적국의 재산 중 가옥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집이나 건물을 지칭하는데,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됐지만 일부가 남아 역사적 가치로서 보존되거나 카페 등으로 리모델링 되며 눈길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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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지붕과 2층식 건물 구조는 네덜란드 건축의 영향을 받은 일제강점기 일본식 가옥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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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보면 마주하는 2층식 주택의 모습. 한눈에 봐도 당시의 역사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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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심부인 후암동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며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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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을 걷다 보면 종종 일본식 주택을 만난다. 낡은 2층 구조에 외벽보다 긴 처마, 뾰족한 지붕은 당시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가옥의 특징이다. 이 주변은 일본인 주택단지가 있었던 곳으로 골목마다 적산가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울 문래동과 인천 산곡동의 영단주택은 일본의 전시 체제하에 건설된 국내 노동자들의 주거지다.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바둑판식 구조가 됐고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좁은 골목이 만들어졌다. 또한 공습에 의한 화재 대비를 위해 구조는 목조였지만 외장은 시멘트 몰탈로 마감됐다. 영단주택은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나면서 적산가옥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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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바둑판식 구조가 된 문래동 영단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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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체제하 군수산업체에 근무하는 노동자의 주택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급된 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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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설계됐고, 공습에 의한 화재 대비를 위해 구조는 목조였지만 외장은 시멘트 몰탈로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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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환경의 문래동 영단주택은 해방 후 적산가옥이 됐고 1955년 삼창철강을 시작으로 1968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이 들어서면서 대표적 철재단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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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일제강점기 조선주택영단을 통해 건설된 부평 산곡동 영단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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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에는 주로 어르신들이 집에서 나와 삼삼오오 더위를 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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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을 본 한 어르신은 골목에 자리한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수십년을 함께한 친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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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자태를 하고 있는 영단주택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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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주택은 향후 재개발과 노후로 인한 보수작업으로 건물들의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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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의 삼릉마을은 미쓰비시 중공업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사택이다. 1938년 일제가 일본군 군수물자 보급공장인 육군 조병창을 부평에 세우면서 함께 지어졌다. 작은집 87채가 줄지어 있어 줄사택이라 불렸으며 약 8명의 근로자가 5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생활했다. 다쳐도 치료받지 못하고 편히 쉴 수도 없던 곳. 현재는 60여 채만이 남아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군산에는 군산 유지였던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위해 지어진 일본식 2층 목조 가옥이 그대로 남아있고, 인천 중구 개항장 거리에는 우리나라를 억압했던 외국인들의 치외법권 지역으로서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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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일본이 군수물자 보급 공장인 육군 조병창을 부평에 세울 무렵 지어진 공장 노동자들의 합숙소 '중공업회사 미쓰비시 줄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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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어 '줄사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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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란히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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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문제로 현재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현재 거주하는 가구는 소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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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사택 일대에서는 삼능(삼릉)이라는 상호가 눈에 띤다. 그 명칭은 우리 조상들을 착취한 일본 미쓰비시의 한자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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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일본은 우리나라를 수출허가 면제 대상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수출규제 조치를 놓고 일본은 징용이나 역사 문제가 아닌 '안보 문제'라 했지만 국내 여론은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번 조치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명백한 무역 보복"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선 적산가옥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반복하지 않아야 할 교훈이면서 청산해야 할 잔재이기도 한 적산가옥. 그 의미에 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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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계속되는 한일 갈등. 고조되는 국내 반일감정 속에서 적산가옥의 미래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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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상기획부 phot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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