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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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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 전 조선13도 생각하며 열세 걸음 걸었던 김알렉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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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러시아 극동 최대 도시인 하바롭스크 아무르강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투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항일 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해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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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검어서 아무르강이라고 하던데… 북한의 김정일(1942~2011)도 왔었다고 하고….” 8ㆍ15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현지시간) 러시아 극동 최대 도시인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근처에서 만난 한 한국 관광객의 말이다. 아무르강(黑龍江)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관광지이지만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투혼이 깃든 곳이라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바롭스크는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었던 연해주 지역에 버금가는 주요 항일 투쟁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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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최대 도시인 하바롭스크의 무라비바 아무르스카바 거리 22번지에 있는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 건물 전경. 현재는 신발 매장으로 사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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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 러시아 하바롭스크 사회주의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이 있던 건물 외벽에 ‘김알렉산드라가 이곳에서 일했고, 1918년 영웅적으로 죽었다’는 내용의 기념팻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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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여성 최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3ㆍ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3월. 이동휘(1873~1935)와 류동열(1879~1950), 김알렉산드라(1885~1918), 오하묵(1895~1936) 등이 하바롭스크에 모여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창당 산파 역할은 김알렉산드라가 했다. 그는 연해주에서 태어난 한인 2세였다. 우랄 페름시에서 착취당하는 조선ㆍ중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대변하기 위해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하며 본격적인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16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해 하바롭스크시(市) 당 비서가 됐고, 볼셰비키 혁명 세력으로 활동했다.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는 조국 광복을 위해 러시아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 세력과 손잡아 일제를 몰아내자는 데 의견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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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렉산드라.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자유종을 발간해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독립 정신을 일깨웠다. 출판사 보문사를 세워 한인 계몽과 교육에도 힘썼다. 하바롭스크 무라비바 아무르스카바 거리 22번지에는 당시 김알렉산드라가 일제 밀정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했던 사무실 건물이 있다. 양파 모양의 구리 강판 지붕이 얹어진 3층 붉은 벽돌 건물로 100년이 지났어도 형태가 그대로다. 하지만 김알렉산드라의 흔적은 거의 지워졌다. ‘김알렉산드라가 이곳에서 일했고, 1918년 영웅적으로 죽었다’는 짤막한 문구가 적힌 명패가 전부다. 원래는 그의 부조상도 있었지만 철거됐다. 건물은 현재 신발 등을 판매하는 상업 공간으로 쓰인다.

하바롭스크를 무대로 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창당 후 불과 5개월 만에 러시아 반혁명세력인 백위군의 공격으로 한인사회당도 큰 타격을 받았다. 김알렉산드라 등 18명은 체포돼 아무르강으로 끌려가 총살됐다. 당시 “조선인인 그대가 왜 러시아 전쟁에 참가했나”라는 백위군의 질문에 그는 “나는 조선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는 경우에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총살 전 김알렉산드라는 “조선 13도의 영원한 해방과 독립을 쟁취해 달라”는 말과 함께 13걸음을 걷고 최후를 맞았다. 1918년 9월 김알렉산드라가 죽음을 맞았던 강 유역에는 그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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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여성으로 첫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김알렉산드라가 1918년 러시아 백위군에 잡혀 총살당한 러시아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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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역사에서 지워진 연해주 독립운동가들

살아남은 이동휘는 이후 상해로 본부를 옮겨 한인사회당 활동을 이어 갔지만, 당 내부 노선이 갈리면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양분됐다. 이동휘는 1921년 5월 한인사회당 간판을 내리고, 고려공산당을 새로 꾸렸다. 두 세력은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1921년 6월 러시아 스보보드니(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하던 러시아군이 자유시에 집결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를 감행해 수백 여명이 사살됐다. 이 사건 이후 내분은 더욱 커졌고, 코민테른은 이후 한인들의 독자적인 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휘 체계에 두었다. 국외에서 독립을 꿈꾸며 자생적으로 이뤄졌던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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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이후 역사에서 빠르게 지워졌다. 친미 우파가 권력을 잡은 남한에서는 이념 문제로 배척당했고, 북한에서도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사가 쓰여지면서 이들의 이름은 사라졌다.

민주화 이후 정부가 역사 복원에 나서면서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의 공을 기려 이들에게 각각 1995년, 2009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오하묵과 김철훈 등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의 활동 흔적이나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는 일도 요원하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와 연대해서 일제에 맞서 투쟁을 했고, 성과도 컸다”면서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의 대 한인 정책의 변화로 한인 독립운동이 시베리아 현장에서 그 길을 잃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현지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 관계자는 “의병장 유인석과 한인사회당 위원장이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여성 최초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등 역사에 묻힌 수많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이끌기 위한 기념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바롭스크=글ㆍ사진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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