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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강점기 병참기지 된 한국…日에 의존하도록 산업구조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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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4주년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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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격적인 경제 도발로 한일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자 문제로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경제 수탈의 역사이기도 하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제 경제 수탈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매일경제는 광복 74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자행된 수탈의 핵심인 △토지 △자원 △금융 △산업 등을 경제 요소별로 되짚어봤다. 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허수열 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정연태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등 이 분야 권위자인 4인의 역사학자에게 물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수탈이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제강점기 때 놓인 철도다. 정태헌 교수는 "일제가 세운 철도는 국내 산업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지 않았고 기본이 병참을 위한 목적의 철도"라며 "산업시설로 향하는 가지(지선)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철도부설권을 일본이 가져가면서 철도는 중국과 러시아로 향하기 위해 놓였고, 지역 불균형을 초래했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에 고급 기술을 가르치는 학과가 없었다. 1941년에 비로소 이공학부가 생겼고 고급 교육은 일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인원만 800만명을 훌쩍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 토지 빼앗아 소작료 50%이상 인상

매일경제

세계 곳곳서 "日, 위안부 문제 사과하라" 세계 위안부 기림일이자 74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400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왼쪽). 같은 날 대만 타이베이에서도 집회 참가자들이 일본 정부의 위안부 관련 사과를 요구하는 펼침막을 들고 있다. [김호영 기자·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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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이뤄진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총독부 소유의 국유지로 편입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는 게 각종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당시 관아에서 저율의 소작료를 징수하던 관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편입시켰고 고율의 세율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신 교수는 "이 토지들에 대한 소작농의 경작권을 부정하고 소작료를 50% 이상으로 인상시켰다"면서 "그 결과 경작권을 가지고 있던 한국 소작농은 그 권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소작료 또한 총생산물의 50% 이상으로 인상됐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이것이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토지 개혁 성격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뿐만 아니라 민유지 역시 조선총독부 소유로 강제로 편입시켜 한국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신 교수는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된 1918년 12월 기준 일제는 무력과 권력으로 국토 총면적의 절반이 넘는 50.4%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시켰다"고 설명했다. 정연태 교수는 "한국인 지주제는 약화되고 지주제가 식민 지주제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한국인의 사유지 상당 부분을 약탈해 강제로 편입시켰고, 일제 조선총독부는 한국 내 최대 지주로 올라섰다. 이를 통해 지세 수입의 원천을 대폭 확대하고 수입을 크게 늘려 식민지 조세 수탈을 강화했다.

◆ 日수탈로 조선은 식량난 시달려

각종 연구 자료에 따르면 특히 일제 치하에서 생산량의 절반 이상의 쌀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쌀의 반출량 증가분이 생산량 증가분보다 훨씬 많았다. 정태헌 교수는 "쌀의 총생산량 대비 일본으로 넘어간 쌀은 1910년대 10% 수준이었지만 1920년대 40%가 넘어섰고 1935년에는 53%가 넘었다"고 설명했다.

정태헌 교수는 "쌀 소비는 삶의 질과 직결돼 있는데 당시 쌀이 무관세로 해외로 나갔다"면서 "조선인들의 쌀 소비량은 그로 인해 절반으로 줄었고 궁출기에는 더욱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 부족으로 도저히 살 수 없어 만주 등으로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1인당 쌀 소비는 1912년 0.77석에서 1926년 0.53석, 1936년 0.38석으로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당시 국내 쌀 소비량은 일본의 1870년대와 비슷한 수준일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이런 가운데 조선총독부는 1920년과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했다.

특히 2기 계획 기간에 생산량은 1.4배 증가한 반면 반출량은 5배가 증가했다고 한다. 특히 세계적인 대공황(1929~1933년) 전후 무렵 조선 쌀의 일본 반출량은 500만~900만석에 이르렀다.

◆ 극심한 인플레이션 초래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전신)은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보조하는 대표적 식민지 금융기구였다. 일제는 1909년 영업을 시작한 한국은행의 명칭을 2년 뒤인 1911년 조선은행으로 바꿔버렸다. 일반 상업은행 업무도 겸하면서 중앙은행이 성장하는 길을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일제는 조선은행권을 무리하게 발행함으로써 발행액은 1936년 기준으로 1945년까지 23배가 폭증했다. 일본은행권으로 일본 국채를 매입하고 이 국채를 보증준비로 조선은행권을 발행하는 방식이었다. 조선인에게 인플레이션을 전가시키는 장치로 직접적 수탈 이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이다. 중일전쟁 이후 서울의 생필품 물가는 최고 229배까지 오르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는 광복 후까지 계속돼 한국의 경제 재건을 더욱 힘들게 했다. 정태헌 교수는 "일제가 을사늑약 이후 가장 먼저 서두른 일이 화폐 금융 주권을 박탈한 것"이라며 "화폐와 금융 주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을 일본 공업제품의 독점적 판매시장으로 개편했고, 한국을 대륙 전진 병참기지로 개편하면서 식민지 시대 공업 생산 구조의 대일 의존성이 심화됐다.

◆ 농가 절반 빈농으로 전락

일제는 국토 절반의 토지를 약탈하는 정책을 시행해 조선인은 대부분 극도로 영세한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허수열 교수는 "1940년에도 조선 전체 인구의 7할에 해당하는 1700만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며 "1925년 이후 농가 소득이 급감해 1930년이 되면 거의 바닥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와 당시 통계에 따르면 1930년 소작농의 68.1%, 전체 농가의 48.3%가 춘궁 농가였다고 한다. 전체 농가의 절반이 기본적인 식생활조차 지속하기 어려운 영세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가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생활고를 견디기 위해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향했고 그곳에 무허가 건물을 짓고 거주하는 이른바 '토막민'이 잇따라 생기게 됐다. 소위 토막민은 1931년 5093명에서 매년 급격히 늘어나 1942년 3만명을 넘어서 무려 6배가 늘어났다.

[안두원 기자 / 김정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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