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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비극과 통한이라도…과거 알아야 生도 분명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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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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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와 얕은 언덕을 넘으니, 시계(時計)와 시계(視界)가 온통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중앙에 '경(京)' 자가 새겨진 적색 벽돌로 쌓아올린 비통한 유적이다. 아직 건재한 제12옥사(獄舍)에 들어가면 2.4㎡(0.7평)짜리 공간이 좌측에 있는데 요즘 말로는 독방, 당시엔 '먹방'이라 불렀다 한다. "마치 먹물처럼 깜깜해 먹방(Ink Cell)으로 불린 장소다. 24시간 내내 한줌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48)이 먹방 옆에서 설명을 이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기해년의 광복절을 맞아, 박 관장과 지난 13일 만났다. 섭씨 34도의 폭염이 형무소의 적벽을 제대로 달구던 중이었다.

―옥사의 여름 나기는 상상조차 불가한 날씨다.

▷환기도 안 됐으니 당시엔 얼마나 더웠겠나. 용변통을 두고 심훈 선생은 회억했다. "뙤약볕이 내리쪼이고…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냄새에 벌레에…. 상상할수록 그분들은 어떻게 지내셨을까를 생각한다. 섣불리 시대와 상황을 평가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매일 비극적인 장소로 출근하는 기분이 묘할 듯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장 애달프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꼽는다면.

▷출근할 땐 감상에 빠지지 않고 사유를 객관화하려 노력한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의 의무다. 다만 슬픈 장소를 꼽는다면 사형장이다. 사형장 바깥과 안쪽에 두 그루의 미루나무가 1923년 심어졌다.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원통함에 선열들은 바깥의 미루나무에 기대 울었고 그래서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렸다. 사형장 안쪽 미루나무는 2017년 고사했다. 미루나무는 보통 생장이 빠른데 늘 시들했다. 선열의 한(恨)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며 기억에 남는 수감자는 누구였나. 특히 더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는다면.

▷서대문형무소에 다섯 번 수감된 박진홍(朴鎭洪)을 기억한다. 마지막 수감 땐 임신 상태였고, 여기서 출산해 여기서 키웠다. 아이 이름은 '철창이 한이다'란 뜻의 철한(鐵恨)이었으나 두 해를 못 넘겨 사망했다. 서대문형무소는 아사자가 속출했는데 박진홍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그의 모친이 조선인 교도관 집에 찾아가 '제발 진홍에게 먹을 걸 넣어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도 있다.

―최연소 수감자는 만 15세였다고 들었다.

▷10대가 전체 수감자의 10%를 넘었다. 다수가 학생이었다. 배화여학교 학생인 김성재, 소은명, 왕종순 등이 만세운동으로 피체됐다. 지금으로 보면 고교 1학년생이었다. 일제는 실제로 형량을 매겼고, 학생이란 이유로 방면하지 않았다.

―옥사의 방사형 구조가 독특하다.

▷장원(莊園) 안에서 농노를 통제하던 봉건제와 달리, 근대 중앙정부는 대중 통제의 필요성을 느꼈고 근대감옥이 출현했다. 일제처럼 제국주의화된 자본주의는 식민 지배에 감옥을 이용했다.

―통한의 민족사를 넘어 세계사적 비극으로 들린다.

▷그렇다. 제러미 벤담이 판옵티콘(Panopticon)을 주장한 이래 방사형 구조 감옥이 퍼졌다. 중국 뤼순감옥, 미국 필라델피아 감옥도 마찬가지다. 침략국이 아닌 식민지에 근대 감옥이 건설됐다.

―감옥사(史)를 전공하셨다. 소명이었을까.

▷2004년부터 근무했다. 고통과 수난의 장소라는 피상적인 감상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데이터에 주목했고 사상범의 '수감기록카드' 6000장을 세분화할 필요를 느꼈다. 지난 4월 출간한 졸저 '식민지 근대감옥 서대문형무소'(일빛 펴냄)는 박사 학위 논문을 다듬고 보완한 책인데, 그 결실이다.

―왜 수감기록카드에 주목했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수감기록카드 우측 하단에 '보존원판번호'가 적혀 있었다. 과거 자료엔 수감자 성명이 가나다순으로 배치돼 있었다. 가나다순이 아니라 비슷한 번호로 연구하면 세밀한 독립운동사가 정립되리라 판단했다. 보존원판번호는 6만 번대까지 존재한다. 6만명의 사상범이 서대문형무소를 거쳤단 의미가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2021년 8월 개관한다. 독립공원을 둘러싸고 역사관과 맞닿아 있다.

▷서대문구의회 건물이 철거되고 건립된다고 들었다. 좋은 입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함께 독립운동사를 연계해 시민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됐다.

―최근 한일 관계가 최악이다. '친일과 반일'의 프레임을 벗어나자는 주장도 나온다.

▷프레임에는 무관심하다. 일본을 반대하자는 게 아니라 식민지배 하에서 통제시스템이 어떻게 꾸려졌는지를 알고, 이로써 우리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의 문제다. 현재 한일 갈등은 아베 정권의 문제이지 일본 시민과 맞서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서대문형무소 연간 방문객 수는 70만명 수준인데 일본인도 작년에 약 6000명 방문했다. 선량한 한일 시민들은 이처럼 성숙한 마음으로 연대한다.

―비극적 장소의 수장으로서, 역사를 알아야 할 이유를 설명한다면.

▷과거를 안다는 건 앎의 문제이지, 일본을 미워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과거를 직시해야 '우리'라는 존재도 분명해진다.

―자신을 버려 이상을 이루는 실천이 독립운동이었을까.

▷봉오동전투처럼 사살하고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야만 독립운동이 아니다. 옆집 아줌마과 뒷집 학생과 같은 범인(凡人)들이 식민지 사회구조를 두고 부당하다고 생각해 정의를 외친 게 독립운동이었다. 인식을 넓혀야 한다.

박경목 관장과 옥사 안으로 동행하는 길, 그가 구두의 흙을 바닥에 털고 입장했다. 감히 먼지 한 톨 용납하기 어렵다는 듯한 겸양이었다.

'늘 털고 들어가느냐'는 질문에 "큰 의미를 두지 말아달라"고 허허 웃으면서도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제 자유롭게 드나들지만 당시엔 아무나 들어가지도, 마음대로 나오지도 못하던 곳이었다. 선열이 죽어나가던 명백한 현장(現場)이었다는 얘기다. 흙을 털고 들어와야 마음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니 습관이 됐다. 그런 마음으로 문턱을 넘는다."

[김유태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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