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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4·19 그날 경무대 앞에서 총격 겪으며 ‘민중혁명’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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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울대 문리대 2년때 ‘4·19’

갖가지 선언문 영어 번역작업 맡아

스크럼 맨앞 교문 나서다 경찰 충돌

팔뼈 부러진 줄도 모른 채 경무대로

발포 순간 수도관 뒤에 숨어 ‘무사’

버려진 교복 명찰 보고 ‘사망’ 추정

‘민중이 주도한 옆으로부터의 혁명’

“스스로 고난 극복의 뜻 실현한 역사”

‘4·19혁명 가치는 자주·민주·민생’

“미국만 의존한 ‘이승만 독재’ 무너져”

장면·박정희·전두환도 ‘민중’ 외면

“촛불혁명 ‘민중의 여망’ 실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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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을 회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은 ‘4·19’를 체험한 것이다. 대학 2학년 때인 1960년 4·19가 터졌다. 나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작성한 각종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또한 동숭동 교정에서 대열을 정비하는 시위대의 맨 앞에 섰다. 스크럼을 짜고 이승만을 성토하는 구호를 외치며 교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교문을 나서자 마자 바로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이 방망이를 인정사정없이 휘두르면서 시위대를 진압했다. 나는 경찰의 방망이를 팔을 들어 방어하다가 팔뼈가 부러졌다. 이후 나는 평소 즐기던 바이올린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시위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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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동에서 종로로 나오니 동대문 쪽에서 고려대 시위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합세해서 경무대로 향했다. 나는 경무대 앞에서도 시위대의 맨 앞에서 수도관을 밀면서 진격했다. 그러자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내 주변의 여러 학우들이 픽픽 쓰러졌다. 나는 키가 작아 수도관 뒤에 몸을 숨길 수 있어서 화를 면했다. 하지만 나 역시 사지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효자동의 높은 흙담을 뛰어 넘어 어느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높은 벽을 어떻게 넘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마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상황에서 초인적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 상의를 벗어 던져버렸다. 교복을 입은 학생은 경찰이 무조건 체포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정교사로 머물고 있던 집을 향해 힘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부러진 팔이 퉁퉁 부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말할 수 없이 아픈 통증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내 교복 상의를 수거한 서울대에서는 명찰을 보고 내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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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은 한국역사의 ‘뜻’을 고난의 역사로 파악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고난을 극복하는 데서 뜻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볼 때 4·19는 한국 현대사에서 고난의 극복이라는 뜻을 전형적으로 실현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보통 4·19를 혁명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4·19는 노동자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아니고, 군부 쿠데타에 의한 위로부터의 혁명도 아니다. 내가 볼 때 4·19는 민중이 주도한 ‘옆으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the side)이다. 민중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확정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민중을 미국 연방헌법 첫 문장에서 명시한 ‘위 더 피플’(We the people)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주지하듯 4·19의 주역은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선도하는 대열에 대학 교수, 고등학생, 일반 서민 등도 대거 참여했다. 나는 이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민중이 적합하다고 본다.

인류 역사 최초로 ‘참정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의 신기원을 연 미국은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인민주권’에 둔다. 링컨이 역설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도 미국 참정 민주주의의 인민주권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 독립선언서에서는 인민주권을 유린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인류는 (생명·자유·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서 유래한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한다면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원칙에 기초를 두고 또 그런 원칙을 구현할 수 있는 형태로 권력을 재편한 정부를 창출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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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4·19가 추구한 가치는 ‘자주·민주·민생’이었다. 애초 이승만 정부는 바로 그 가치를 체제의 정통성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정통성을 구성하는 가치를 모두 철저히 부정했다.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자주를 부정하고, 수많은 양민학살과 부정선거를 반복하면서 민주를 부정하고, 도탄에 빠진 경제를 외면하면서 민생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민중은 비폭력적 수단으로 이승만 정부의 ‘사이비’ 정통성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미국 독립혁명이 인민의 권리를 파괴하는 영국 정부로부터 그 권리를 되찾기 위한 인민의 투쟁이었던 것처럼 4·19 역시 민중의 권리를 파괴하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그 권리를 되찾기 위한 민중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4·19는 미국 독립혁명과 달리 대학생이 선도한 민중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사건이었다. 요컨대 4·19는 민중이 자신에게 강요된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는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민중을 선도한 대학생은 권력의 야망을 갖고서 4·19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만을 축출한 직후 곧바로 대학으로 복귀했다. 그러자 정치권에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그 공백은 기성 정치인이 채워줘야만 했다. 그러나 4·19 이후 등장한 장면 정부는 극심한 권력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중의 여망을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했다. 장면 정부의 정치적 무능력은 결국 5·16 군사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민중이 피를 흘리며 성취한 4·19의 뜻이 박정희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18년 군사독재 정권도 이승만의 12년 독재 정권과 유사한 방식으로 무너졌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체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박정희가 정통성이 부재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미국의 권력에 철저히 의존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출신이었지만 5·16 쿠데타 이후 미국이 표방하는 반공주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미국의 권력에 적극 영합했다. 미국이 세계적 차원에서 반공주의를 실현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반공 거점 국가의 경제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역시 미국이 지도하는 경제개발전략을 따르면서 미국의 세계전략에 적극 복무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반공주의적 세계전략을 이른바 ‘조국 근대화’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자신의 체제 정통성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의 민중에게 박정희가 유린한 자주와 민주의 가치는 민생이라는 가치 하나만으로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결국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이 선도한 ‘민중’이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을 강력하게 부정하기 시작했다. 김재규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사살한 것은 부마민중항쟁의 맥락에서 터진 사건이었다. 요컨대 한국의 민중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정통성을 심판했던 것처럼 박정희 독재 정권의 정통성을 또다시 심판하면서 자신에게 강요된 고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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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중항쟁을 통해서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왔지만, 정치권의 권력의 공백 또한 형성되었다. 정치권의 권력의 공백으로 생긴 위험천만한 상황은 최규하 과도정부가 슬기롭게 극복해야만 했다. 또한 서울의 봄으로 해금된 유력 대권주자 ‘3김’도 가장 우선적으로 최규하 정부에 적극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3김의 가장 우선적 관심사는 대권에 대한 욕심이었다. 3김은 각자도생하면서 대권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최규하 정부가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를 막을 수 없을 만큼 정치적으로 무능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세칭 박정희의 양아들이었던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군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탈취하고, 5·18 광주민중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정권까지 탈취했다. 4·19에서 시작되고 부마민중항쟁, 5·18 광주민중항쟁 등에서 계승하고자 했던 민중의 뜻이 또 다시 전두환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5·16 군사 쿠데타의 데자뷰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회고해보면, 나는 가장 먼저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김수환 추기경이 수행한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이 광주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소행으로 낙인 찍은 것이었다. 김 추기경은 전두환이 광주민중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있다는 소식에 위로편지와 위로금을 보냈다. 편지에는 전두환의 무력 진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약속도 담았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1980년 5월20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전두환을 만나 무력 진압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1987년 6월 민중항쟁 때는 경찰이 명동성당에서 시위 중인 학생들을 잡으러 들이닥치자 이렇게 외쳤다. “학생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밟고, 내 뒤의 신부를 밟고, 신부 뒤의 수녀를 밟고서 잡아가라!” 김 추기경은 서슬이 시퍼런 전두환과 정면에서 대결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김 추기경을 몇 차례 만나면서 직접 확인한 모습은 전혀 달랐다. 김 추기경은 ‘바보 김수환’이란 별명이 말해주는 것처럼 지극히 온화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잔잔하게 얘기하면서 상대방의 얘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특히 김 추기경의 정치적 관심은 정치 권력에 야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치 권력의 폭력에 희생된 민중을 한없이 껴안는 방식으로 실천되었다. 김 추기경이 실천한 방식은 한국의 모든 종교인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전두환은 김 추기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중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두환은 광주 민중을 빨갱이로 낙인찍고, 자신은 빨갱이를 때려잡은 애국자로 선전했다. 이승만이 빨갱이 이름으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박정희가 빨갱이 이름으로 사법살인을 반복적으로 자행한 ‘희생자 비난하기’(Victim Blaming) 수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자 한국의 수많은 정치인·지식인·언론인 등이 전두환의 선전에 적극 호응했고, 지금도 호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호응할 것이다. 광주민중항쟁과 북한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객관적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광주 민중을 빨갱이로 호도하는 추세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안치환이 그런 세태에 몸서리치면서 ‘빨갱이’란 제목의 노래를 이렇게 절규하듯 부르고 있지 않은가? “… 아무런 논리도 필요 없어, 누구도 책임질 필요 없어, 무조건 빨갱이라 몰아붙이기만 하면 돼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자, 단숨에 쓸어버리고 싶을 땐, 무조건 빨갱이라 몰아붙이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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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를 체제 이념으로 선택한 소련·중국·북한 등의 국기는 온통 빨강색으로 되어 있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중국을 ‘레드 차이나’(Red China)라고 부른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빨갱이는 사회주의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빈부 격차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현실에서도 중국·베트남·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가 존재한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장점을 수용해서 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한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사회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나라였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중산층이 붕괴되자 버니 샌더스와 같은 정치인은 사회주의적 강령을 들고 나와 중산층 구제를 역설하고 있다. 현재 샌더스는 1)의료보험 국영화, 2)대학교 무상교육, 3)국가에서 최저임금 보장 등을 역설하면서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만약 우리가 맹종하는 빨갱이 논리대로라면, 중국·베트남·북한 등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 유럽 사회민주주의, 버니 샌더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도 모두 부정하고 죽여야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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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빨갱이 누명 때문에 한평생을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사셨다.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세상에 떳떳이 나설 수도 없었다. 결국 술을 자주 드시면서 세상을 일찍 하직하시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 나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사신 분이 우리 사회에서 한두분 뿐이겠는가?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빨갱이를 맹목적으로 부정하기 이전에 빨갱이가 상징하는 사회주의를 이성적으로 꾸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의 장단점을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을 우리 사회에서 공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라야 우리의 영혼을 옥죄는 빨갱이 주술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또 그럴 때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과 통일의 지평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19가 제시한 뜻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의 민중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하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 정치적으로 분열하면서 노태우가 겨우 36.6%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4·19 이후 민중의 여망을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한국정치의 한계가 또다시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2017년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민중의 여망을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4·19가 제시한 자주·민주·민생의 가치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것,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의 초석을 탄탄하게 다지는 것, 문재인 정부가 민중의 여망에 부응하는 길도 여전히 거기에 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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