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코드는 영화계에선 양날의 칼이었다. 국내 개봉 영화 중 최고 흥행기록을 지키고 있는 <명량>(2014)은 왜군을 거침없이 격파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대놓고 전면에 내세웠지만 호쾌한 해전 장면 덕에 ‘국뽕’ 논란은 피해갈 수 있었다. 반면 올해 개봉한 <자전차왕 엄복동>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개봉시기만 보면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대에 못미친 영화 내용으로 흥행에 참패하면서 17만여명을 기록한 관객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희화화되는 소재가 됐다. ‘17만=1UBD(엄복동)’이라는 새로운 단위로 영화의 흥행 정도를 가늠하는 데 활용된 것이다.
7월 24일 서울 중구 메가박스 동대문점에서 열린 영화 <김복동> 언론시사회에서 송원근 감독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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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다룬 <김복동> <주전장> <에움길>
광복절을 끼고 있는 8월을 맞아 일본, 특히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영화들이 속속 개봉하고 있다. 제작 당시에는 최근의 악화된 한·일관계를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마침 반일 열풍과 함께 과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분위기가 길게 이어지는 상황이라 예상을 뛰어넘어 관객 동원에도 성공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한국인의 반일 정서에는 오래 묵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점을 부각한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들이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사죄하라고. 알겠느냐!”
7월 24일 열린 영화 <김복동>의 언론시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피해자이자 운동가로 활동했던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모습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제막식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부터 올해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사죄를 요구했지만 끝내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삶을 영화로 정리한 송원근 감독은 “할머니 얘기를 꼭 하고 싶었던 이유는 할머니가 암 말기라는 것 때문”이었다며 “암 말기에 그렇게 처절하게 싸운 할머니가 무엇을 찾고 싶었던 걸까, 그걸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8월 8일 추모주간에 맞춰 개봉하는 영화는 흥미 위주 또는 신파 위주의 감정선을 뺀 다큐 영화 특유의 건조한 흐름으로 김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조명한다. 다만 김복동 할머니의 목소리가 향하는 시점을 현재로 맞추면 파급력은 작지 않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내각이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온 결과가 수출규제와 불매운동으로 이어지는 양국의 관계악화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항일투쟁 다룬 대작 <봉오동 전투>도
국내에서는 피해 할머니들의 고통으로 더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우익의 시선에서 접근한 또 다른 다큐 영화 <주전장>도 반일 시류와 맞물려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침 아베 총리가 이슈를 만들어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아베 총리에게 감사드려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미키 데자키 감독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보통의 일본인들과는 다른 지평에 서서 일본 우익들을 바라보며 위안부 문제를 필름에 담았다. 우익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3년에 걸쳐 한·미·일 3국을 오가며 쟁점이 되는 부분들을 스크린에 옮겼다.
지난 4월 일본에서 먼저 개봉한 당시에도 화제를 모으며 영화에 나온 우익 출연자들로부터 상영금지 소송이 제기되는 등 쉽지 않은 상영 과정을 거친 미키 데자키 감독은 최근 국내에서 이어지고 있는 일본 불매 움직임에 대해선 “일본영화가 아니니 보이콧하지 말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인권의 문제인데도 아베 정권이 무역제재라는 방식을 통해 외교적 문제이자 싸움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는 건 굉장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다만 자신의 영화를 통해 “일본 정부와 일본 사람의 의견은 다르다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도 밝혔다.
<김복동>과 <주전장> 모두 흥행을 목표로 한 영화가 아니었지만 반일 기류와 함께 불어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 덕에 예상보다 더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고 있다. 1주 전까지만 해도 <주전장>이 확보한 상영관 수는 전국을 통틀어 25개에 불과했지만 7월 25일 개봉을 앞두고 상영관을 늘려달라는 관객들의 요구가 빗발치면서 상영관 수는 59개로 늘었다. 독립영화 전용관 외에 CGV·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도 30곳 이상의 상영관을 배정한 것이다. <김복동>은 현재로선 개봉 전이라 상영관 수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역시 개봉이 임박하면 상영관 확대 요구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흥행을 목적으로 한 상업영화 중에는 항일투쟁을 다룬 대작 <봉오동 전투>가 8월 7일 개봉한다. 유해진·류준열·조우진 등 유명배우들이 출연해 1920년 만주에 터를 잡고 있던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를 스크린에 재현한다. 총제작비로 190억원이 투입된 데다 반일 열풍을 그대로 홍보에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같은 시기 개봉하는 한국영화들과의 경쟁에서 얼마만큼의 성적을 올릴지 주목받고 있다.
다큐 영화 <에움길>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지난 6월 개봉했지만 독립상영관과 초청상영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상영을 이어가고 있다. 2016년 개봉한 영화 <귀향>에 일본군 역할로 출연한 배우였던 이승현 감독은 <귀향> 제작 당시 스태프로도 일하면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접해 이번 <에움길>에서는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는 할머니들의 20여년 전부터 최근까지의 모습이 담긴 기록들을 하나하나 충실히 담는 데 중점을 뒀다. 나눔의집이 보관하던 영상자료를 영화 곳곳에 담는 한편, 이옥선 할머니는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을 맡았다. 이 할머니는 지난 6월 영화 시사회 자리에서 “세상 어떤 부모가 그런 곳으로 돈벌어 오라며 자식을 보내나. 일본은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당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거다”라며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만행과 과거사를 담은 영화들이 연이어 스크린을 장식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지만 당사자와 주변에선 이들 피해자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 안타깝다. 경기 광주에 있는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투쟁적인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할머니들의 일상을 녹여내 좀 더 특별한 삶을 살아온 한 여성의 삶으로 많은 분들이 영화를 봐줬으면 좋겠다”며 “영화에 등장하는 30여명 할머니 중에서 현재까지 살아계신 분은 이제 4명뿐”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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