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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더 새롭고 강해진 사회주의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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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대항 페미니즘 집단 기획

젠더·섹슈얼리티·재생산…35개 글 담아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현재진행형”



한겨레

사회주의 페미니즘
-여성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완전한 자유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따비·3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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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철 지난 유행가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소멸한 이론이 아니냐는 지적에 미국 철학자 낸시 홈스트롬(럿거스대 명예교수)은 잘라 말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현재 진행형인 기획”이며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기에 알맞은 때”라고.

미국 먼슬리리뷰 출판사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처음 나온 2002년은 신자유주의 물결이 극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세계화와 양극화에 맞서 위기감을 느낀 지식인들이 또 그만큼 치열하게 대안을 찾으려 연구하고 논의하던 때이기도 했다. 이 책 또한 신자유주의의 점증하는 위협에 대항하는 좌파의 이론적 기획 가운데 하나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지닌 강점과 자원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뚜렷이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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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체트킨, 엘리너 마르크스,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같은 선구자들의 글을 발췌하긴 했지만 본격 소개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가장 심하게 타격을 받는 이들이 여성이라고 본 홈스트롬은 현대적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야기를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재해석하고 그 단일한 우산 아래 저명한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활동가, 작가 들 35명의 글을 가려 묶는 프로젝트였으니 새롭고도 야심찬 기획이었다.

홈스트롬은 지금까지 가장 널리 쓰인 로즈마리 통의 페미니즘 분류법(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급진·정신분석학·사회주의·실존주의·포스트모던적 페미니즘)보다 훨씬 더 폭넓게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정의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무시했던 쟁점인 젠더, 섹슈얼리티, 가족 내 관계 등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옛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라면, 홈스트롬은 한발 더 나아가 “계급과 성뿐만 아니라 인종/민족이나 성적 지향 등 정체성의 다른 측면까지도 통합”하려 했다. “세계 대다수 여성의 착취와 억압을 가장 탁월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접근법”으로서 ‘새로운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제출한 것이다.

현대적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계급’을 중심에 놓으면서도 성적, 인종적 억압을 경제적 착취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여러 요소가 맞물려 작동하면서 억압과 불평등 구조를 생산, 유지한다고 본다. 이런 중층적인 분석 덕분에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왜 아버지 없는 가족이 일반화하는지, 월경전증후군과 여성 노동 규율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제3세계 여성노동자들의 연대가 가능한지 등의 내용이 다양하게 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미국 여성 노조 투쟁사, 폭력과 여성 투옥의 상관관계, 군사화와 여성의 삶, 탈식민주의 에코페미니즘 사상까지 신선한 주제의 글들이 다수 실렸다.

특히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던 ‘계급’이 어떻게 인종/민족 및 섹슈얼리티와 교차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읽을 필요가 있다. 미국 작가이자 레즈비언 활동가 도로시 앨리슨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글 ‘계급의 문제’는 맨 앞에 실린 만큼 책의 지향을 확실히 보여준다. 동성애자와 가난을 경멸하는 세상에서 가난에 찌든 10대 백인 여성의 사생아로 태어나 친족 성폭력을 겪고 신체적 학대를 받으며 20년을 보낸 레즈비언 앨리슨은 이렇게 정리한다. “고통을 겪는다고 사람이 고귀해지지 않음”을 알지만, “경멸받는 습관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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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의 세계관이 득세하는 가운데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난한 여성들을 ‘복지 수급자 여왕’(welfare queen)이라 낙인 찍으며, 하위계급 분할 통치로 더 약한 사람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신자유주의의 그늘에 관한 섬세한 분석을 놓치지 않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가장 많이 닦달 받는 이들 (…) 여성, 온갖 인종의 동성애자, 유색인, 추방당한 자, 박해받는 자, 주변으로 밀려난 자, 외국인 등” 복수의 주체성이 만들어내는 지식은 계몽시대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이 책은 결국 “책임성이 있는 동시에 참여적인 지식”(낸시 하트삭) 창출의 기획이 아닐는지.

2012년 메이데이에서 첫 출간한 한국어판 제목은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였다. 검열이 횡행하던 이명박 정권 때였으므로 원래 제목(‘사회주의 페미니즘 프로젝트’)을 쓰기 힘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오기도 했고, 절판 이후 재발간을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번 책에서는 용어 표기에서 정확성을 한층 높였고, 박미선 한신대 영문과 교수의 깊이 있는 해제로 이해의 폭도 넓혔다. 원서와 달리 새빨간 한국어판 표지가 딱딱하고 ‘왼쪽’ 이미지만 담았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여성주의가 늘 불온한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적절할 이유도 없겠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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