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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반세기 출판 화두는 ‘민족문화 우수성 알리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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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지식산업사 김경희 대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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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분야를 대표하는 출판사 중 한 곳인 지식산업사(대표 김경희)가 지난달 8일 창립 50년을 맞았다. 쉰이니 성대히 자축할 만도 하지만 조용히 넘어갔단다. 10일 서울 경복궁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김 대표는 “서울 서촌 사옥 리모델링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연말까지 공사를 마치고 내년에는 50년사와 자신의 회고록도 낼 계획이란다.

지식산업사가 펴낸 천여 권의 책 가운데 90%가 학술서다. 한국 학계의 거목인 김용섭(한국 경제사) 조동일(한국 문학) 신용하(사회학) 이태진(한국사) 교수 등의 주요 저작이 이 출판사에서 나왔다. 학술원 우수도서를 받은 책도 수십 권이다.

‘한국형 세계문화 발전전략으로 새날을 창조하다.’ 지식산업사 인터넷 사이트 대문에 적힌 문구다. “직원들한테 1999년까지는 위대한 민족문화 계승과 발전에 앞장서자고 했어요. 2000년 이후로는 위대한 전통문화를 날줄로, 우리가 못가진 외래문화를 씨줄로 한국형 세계 문화를 발전시키자고 강조하고 있어요.”

왜 민족문화일까? “초등 1학년 때 해방을 맞았어요. 그 전까지는 일본이 내 조국인 줄 알았어요. 일본인 교장이 일본말을 쓰게 했죠. 해방된 날 산에서 초등 5, 6학년 형들과 함께 솔뿌리를 캐 망태에 담아 내려오는 데 한국 선생님이 ‘경희야 우리나라 해방됐어, 일본이 망했어’라고 하더군요. 깜짝 놀랐죠. 그 전에는 일본 이름(젠이치로)으로 나를 불렀거든요. 그때 내가 식민지 망국노였다는 걸 깨달았죠.”

그 뒤로 민족문화는 평생 그의 화두이자 과제였단다. “해방 뒤에야 내 나라가 조선이고 훈민정음이라는 문자가 있고 문화가 일본을 앞섰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 뒤로 70년 동안 좌우 갈등과 남북 대립 그리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걸 봤어요. 그 역사의 아픔과 희망, 소망, 갈등에서 사명감이 나왔죠.”

출판사 사정을 묻자 김 대표는 “적자다. 허덕허덕한다”고 했다. 1984년 부도가 나기 전 사세가 좋을 때는 외판 사원까지 직원이 500명 가까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7명이다.

이런 형편에도 그가 올해 3·1운동 100년 기념 출판에 힘을 쏟는 것은 바로 해방을 맞은 날의 깨달음 때문이다. 3월에는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일 역사학자 10명의 글을 모은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를 냈고 ‘민족주의’를 주제로 한 단행본도 곧 나온다. 이윤갑 계명대 교수가 지난 100년 경북 성주 지역의 역사를 사회 문화사까지 포괄해 정리한 책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여름에는 지난 100년의 역사를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그 결론에 따라 앞으로 100년 통일국가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 설계도와 시방서를 준비해야죠. 학자나 언론인, 지식인, 사회지도층이 그 일을 맡아야죠. 우리 민족이 당당한 세계사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요.” 이 말 끝에 그는 3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한국출판인회의 공로상을 받는 자리에서 내가 중국 쑨원(1866~1925)이 죽기 전에 했다는 ‘중국혁명상미성공’이란 말을 했어요. 중국혁명은 끝나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잘 해서 완성하라는 말이죠. 3·1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3·1혁명 100년을 맞아 출판인으로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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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1961년 출판사 민중서관(현 민중서림)에 들어갔으니 올해로 출판 인생 58년이다. 민중서관과 을유문화사에서 10년가량 일하다 1971년 “도와달라”는 사촌형(고 김우정 지식산업사 창업자)의 부름에 지금의 출판사로 옮겼다. 사촌형은 당시 이어령 선생 등과 함께 실존주의 문학의 기수로 불리던 문학평론가였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던 임방현·김철순씨가 평론가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며 권유해 형님이 두 논설위원과 출판사를 세웠죠. 출판사 경영이 어려워 다른 두 분은 1년도 안 돼 회사에서 손을 뗐어요. 75년 출판사에 불이 나 형님이 다치는 바람에 내가 76년부터 경영을 맡았어요.”

김 대표는 지난 50년 출판 목록 가운데 <이조회화>(1971)와 <한국사연구입문>(1981)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형님의 출간 모토가 한국인의 심성 찾기였어요. 한국미의 원형을 찾는 출판을 제안해 제가 당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을 찾아가 논의한 끝에 <이조회화>가 나왔어요. 우리 전통 회화를 담은 첫 칼라도판집이죠. 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이 책을 선물했죠.” 우리 학계의 한국사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연구 과제를 제시한 <한국사연구입문>은 <새로운 한국사 길라잡이>(2권, 2008)란 이름으로 3판까지 나왔다. “일본 학자들이 1959년 조선사연구회를 꾸려서 <조선사 입문>을 낸 데 이어 개정판까지 펴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한국사연구회 대표 간사를 맡고 있던 강만길 교수에게 제안해 나온 게 <한국사연구입문>이죠. 강 교수 후임 간사인 김용섭 교수가 출간 작업을 떠맡아 사학자 50여 명이 2년간 18차례나 출간 회의를 했어요. 이 책이 나와 한국사학계가 자존심을 세웠죠.” 그 뒤로 고 김용직 교수의 제안으로 국문학자 80여 명이 참여한 <한국문학연구입문>도 냈다.

1980년대에 펴낸 민세 안재홍(1891~1965) 선집(8권)도 잊기 힘든 책이란다. “내가 민세 선생을 특히 좋아했어요. 고교 국어교과서 제1과에 민세 선생의 ‘민족문화의 진로’라는 글이 있었죠. 민세는 민족문화와 세계문화를 다 건드렸어요. 열린 민족주의자였죠. 박정희의 정권 참여 요청을 거절해 핍박을 당하던 천관우(1925~91) 선생을 찾아갔더니 민세 책 발간을 권하시더군요.”

1969년 창립 뒤 천여 종 출간
한국역사 등 학술서적이 90%
창업자 사촌형 부름에 71년 합류
학자들 후원으로 ‘84년 부도’ 넘기기도


“70년 나뉜 남북 합치는 문화정책을
3·1운동 전 갈래 조사·연구해야”


그는 서울대 2학년 때 학내 서클인 후진사회연구회에 가입했다. “후진성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했죠.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자본주의도 어떤 자본주의냐를 두고 토론을 많이 했죠.” 사학과 졸업 논문도 중국 최초 철도인 북경-진통선 개설을 둔 논란을 다뤘단다. 당시엔 학부생도 졸업 논문을 썼다.

4학년 때 일어난 4·19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단다. “경무대 앞에서 함께 시위한 수학과 친구가 총에 맞아 죽었죠.” 그는 4·19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3·1혁명의 연장선이고, 그 정신은 6·3과 광주로 이어집니다. 4·19는 미국 영향권 안에 있는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정부에 반기를 든 사건이기도 해요. 터키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죠. 3·1혁명도 중국 5·4운동에 영향을 미쳤잖아요.”

민중서원에서 일하던 1964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반대 세력 제거를 위해 꾸민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대법원은 4년 전 이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는 55년 전 사건을 두고 “같이 한 이들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죽기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말을 아꼈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의 실체를 두고는 “63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 성향 인사들이 모인 서클”이라며 “내년에 나올 회고록에서 (인혁당 사건에 대해) 내 나름의 증언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출판사는 창립 15년이던 1984년 부도를 맞았다. 그때 변형윤, 박경리, 조동일, 이태진, 김용덕 등 40여 명의 학자·문인들이 4천만 원을 모아 김 대표를 도왔다. “내가 방만하게 경영한 탓이죠. 한국 경제가 위축되는 시점에 단행본 100권 정도 비용이 드는 겸재 명품 화첩을 냈거든요. 그때는 죽을 생각까지 했어요. 부도액이 6억이었는데 다 친지들한테 빌린 돈이었죠. 학자들이 큰 힘이 됐어요. 변형윤 교수는 지금도 우리 출판사 후원회장이죠.”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러워요. 한국인으로 20세기 후반부와 21세기 초반부를 사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일모도원(日暮途遠·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이라 아쉬워요.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더 잘 해야죠.”

우수한 우리 문화의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전통음악 ‘아악’과 훈민정음을 이야기했다. “우리 문화는 세계 문화의 주요 갈래입니다. 계승할 전통문화가 하나둘이 아니죠. 타슈켄트와 송나라 등 아시아 대륙의 음악이 하나로 합쳐진 게 아악입니다. 아악은 일본 궁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훈민정음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문자이죠. 일본 학자들도 최근엔 그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어요.” 작년엔 신용하, 우실하 교수 등이 저자로 참여한 고조선 문명 총서(전 6권, 2018)도 냈다. 3천 쪽이 넘는 총서의 관점은 고조선 문명이 한족보다 앞섰다는 것이다. “총서를 두고 쇼비니즘(광신적 애국주의)이라는 말도 있어요. 나는 그런 비난에 동의하지 않아요.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꼬실 때는 다 보편세계주의를 주장해요. 하지만 내심에는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 있어요. 왜 우리라고 ‘세계 제일주의’를 내세우면 안 됩니까.”

현 정부의 문화정책 얘기를 꺼내자 그는 “문화정책이 있기나 하냐”고 반문했다. 직무유기란 말까지 했다. “도종환 전 문화부 장관이 평양에 가서 박수친 것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아요. 70년간 갈라진 남과 북이 합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문화정책이 필요해요.” 말을 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언급했잖아요. 약산의 평가를 제대로 하려면 우선 약산의 좌표 설정이 필요해요. 학계에서 약산과 신채호 같은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가에 대한 깊이있는 논문과 저술이 나와야 합니다. 3·1운동의 전 갈래를 조사 연구하고 임시정부가 어떻게 변화 발전했는지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난 아나키스트들은 극좌를 피하고 자유를 확대하려고 노력한 분이라고 봅니다. 백범과 우남도 다시 연구해야죠.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고 깊이 파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어요. 그런데 아직 사료조차 모아지지 않았어요. 더 멀리보고 더 깊이 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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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표는 올해 만 81살이다. 자신이 출판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출판사 대표로는 최고령일 것이라고 자부했다. “주요 필자는 내가 만나요. 저자 선택과 출간 방향도 내가 결정하죠. 물러나기 전에 할 일이 있어요. 우수한 인재를 출판사에 끌어와야 합니다. 그러러면 돈을 벌어야 하는 데 내가 돈 버는 데는 젬병입니다. 출판사는 천재를 스폰서해야 하는데…” 민중서관에 다닐 때 그는 <영한 엣센스 사전> L자 항목을 직접 직필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죠. 그때는 우리말 사전도 일본 사전을 베꼈어요.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 분과학문 사전의 수준은 그 나라 출판의 수준입니다. 출판사 데스크로 있으면 학자나 학문 분야의 한계가 그대로 보입니다. 아직은 선진국에 비하면 멀었어요.”

역대 정권의 출판정책이 화제에 올랐다. “디제이(김대중) 정권 이전에는 어떤 정권도 출판을 도와주지 않았어요. 와이에스(김영삼) 정부 때도 금서가 있었죠. 디제이가 대통령이 된 뒤에 금서를 풀고 학술진흥기금으로 출판을 지원했어요. 디제이 정부 뒤로는 출판 정책에 발전이 없어요.”

지식산업사에서 대표작 <한국문학통사>를 낸 조동일 교수는 최근 “왜 지식산업사에서 책을 내느냐”는 기자 질문에 “김경희 대표는 글을 볼 줄 안다”고 답했다. 김 대표는 자신과 협업한 학자들 얘기가 나오자 이렇게 말했다. “조동일 교수 같은 분은 자기 논리가 있어요. 이 논리를 당당하게 내놓아요. 몇가지 점에서 빼어난 게 있어요. 신용하 이태진 교수도 그래요. 학문을 하려면 인접 학문 학자들과도 협업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학계를 보면 같은 학문 분야 연구자들의 책도 안 읽어요. 뛰어난 학자들은 자기가 관심있는 분야 책이나 석·박사 논문은 물론 의미가 있다고 싶으면 학사 논문도 읽고 인용합니다. 자기 혼자는 못 해요. 확산과 수렴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체계가 섭니다.”

그는 국선도 선사다. 적지않은 나이에도 건강을 지키고 있는 것은 국선도 수련 덕분이란다. “40대에 국선도를 시작했어요. 지금도 매주 두번 파주 출판사 사무실에서 국선도 교육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교육생 7명 중에 출판사 직원도 1명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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