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착했던 곳은 초등학생들이 학원과 과외에 내몰리지 않는 작은 해안도시였다. 공부 스트레스 없는 현지 아이들은 영어는 못하지만 운동과 게임을 잘하는 동양인 친구를 스스럼 없이 받아들여줬다. 운동과 게임의 공통점은 즐기는 데 어려운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말보다 손과 발의 움직임이 핵심이다. ‘패스’ ‘슛’ ‘로그인’ ‘어택’ 같이 단순하지만 놀이엔 꼭 필요한 단어들에 살을 붙여가며 아이는 현지인들의 언어와 문화에 점점 익숙해졌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게임을 곧잘 하는 아이가 그땐 기특했다.
그러나 귀국 후 아이가 한국 초등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게임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180도 바뀌었다. 방과후에도 숙제와 학원 등 늘 할 일이 있는데, 게임을 조금이라도 오래 하는 모습이 보이면 조바심이 났다. 운동은 얼마든지 괜찮지만 게임은 좋을 게 없다고 아이를 나무랐다.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았는데도 모바일 게임 용어를 술술 읊는 걸 보곤 엄마 없는 데서 친구 스마트폰으로 늘 게임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근거 없이 의심도 했다.
게임이 얼마나 건강에 좋지 않은지, 게임 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이상이면 성장발달에 문제가 생기는지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게임중독’이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도대체 얼마만큼 게임을 해야 중독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들도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주변 어른들이 각자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게임이 과한지 아닌지를 그때그때 판단해 아이에게 그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게임은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만큼 접근을 아예 막아야 한다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집 밖에서 시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게임 말고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는 부모도 있다.
보건당국은 그래서 게임중독을 정식으로 질병 목록에 올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이달 28일까지 열리는 제72회 총회에서 ‘게임장애’를 정신 질병의 하나로 지정할지 여부를 논의하는 중이다. WHO가 게임장애를 병으로 지정하면 3년 뒤 발효돼 그 기준이 세계적으로 통용된다. 복지부는 이를 참고해 우리나라에서도 게임중독을 공식 질병으로 정하고 정의와 진단 기준 등을 명확히 세운다는 계획이다.
그러면 게임중독에 해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국가가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효과적인 예방과 치료 방법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누가 중독이고 누가 중독이 아닌지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테니 학부모들이 “우리 아이가 게임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중독이 아닐까” 같은 막연한 걱정을 덜게 될 것으로 보건당국은 예상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게임 과몰입이나 중독이 사회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만큼 국가 차원의 관리 방안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한 의과대학 교수는 “정부가 공개적으로 나선다면 이전처럼 가정에 해결을 맡겨두는 것보다 체계적인 대처가 가능해질 테고, 게임산업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은 기업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분위기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만 그는 ‘낙인’ 문제를 자칫 간과할 수 있다고 짚었다. 공식 진단의 시험대에 올라 처음 ‘게임중독 환자’가 될 아이들의 미래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다.
최근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을 한번 더 바꿨다. 매주 한 번씩 또래들과 함께 온라인 게임을 스스로 만들고 직접 해보며 오류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컴퓨터 수업에 아이를 보내고 있다. 아무리 막아도 아이들이 게임을 접하는 환경을 피할 수 없다면, 게임을 통해 새로운 뭔가를 배우게 하려는 의도다. 사교육과 타협한 건 찜찜하지만, 게임이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도 미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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