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을 삭제해버리고, 그저 ‘내가 결혼하자는 말을 했으니 너는 심쿵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남성중심 연애서사의 굉장한 오만이다.
위 문장은 작년 서울장미축제의 대표적 홍보문구였다. 올해는 보도자료에는 저 말이 사라졌지만 축제가 가진 감수성은 예년과 달라진 바가 없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포스터에는 늘 장미아가씨(무려 공식 명칭이다)가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 2016, 2017년에 사용된 포스터는 풍성한 장미를 거꾸로 놓고 아가씨의 치마처럼 형상화해 장미가 아니라 마치 치마 속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해라기엔 노골적으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구도의 그림이라 다른 해석이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 디자이너가 바뀌고 장미아가씨의 옷은 달라졌지만 ‘장미아가씨가 매혹적인 자태로 변신하였습니다’라는 공식 홈페이지의 설명을 보고 있자면 이 축제가 여성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더욱 선명해진다.
‘매혹’이라는 말은 남의 마음을 사로잡아 호린다는 뜻이다. 여성은 꽃처럼 예뻐서 남자의 마음을 훔치는 역할을 하다가, 프러포즈에 감동해서 결혼을 한 뒤 2세를 낳아 아름다운 어머니의 역할을 하길 바라는 마음을 구구절절 축제의 요소요소에 녹인 것처럼 보인다.
솔로탈출이라는 커다란 글자판을 흔드는 모델의 사진이, 화장품 회사의 협찬으로 여심을 잡는 뷰티존을 만들겠다는 감독의 계획이, 꽃을 내미는 남자와 상기된 듯 양볼을 감싸쥔 여자의 일러스트가, 장미의날-연인의날-아내의날로 이어지는 축제의 일정이,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는 아내의날의 다짐이 곳곳에 배치되어 장미축제는 사실 꽃놀이를 가장한 지자체의 결혼장려 프로젝트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갈 지경이다. 심지어 젊은층과 외국인을 위한다는 연인의날에는 패션쇼가 열리는데 프러포즈와 웨딩, 2세의 탄생으로 스토리를 구성해 연출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장려가 아니라 강박이다.
한국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여성들은 더 이상 깜짝이벤트를 원하지 않는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연이어 사회면에 보도되고, 남편 혹은 전 애인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사례 또한 낯설지 않다. 범죄에 희생되지 않은 무탈한 하루였다고 해도 성별에 따라 다른 임금을 받는 노동을 했고, 집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4배 더 많은 가사노동을 했다. 온라인에서는 수많은 여성혐오표현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스크롤을 내려야 하는 이 하루하루의 삶이 달라지지 않는 한, 장미축제가 아무리 화장품 샘플을 나눠준대도, 당신이 축제의 주인공이라고 떠든대도 반갑지 않다. 일상의 고통을 외면한 채 아내 혹은 예비아내에게 무대에서 꽃다발을 건네는 행사는 더 이상 감동적이지 않다.
‘앞서가는 축제, 문화트렌드를 반영하다!’라는 홍보문구가 진정성을 가지려면 장미축제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 그저 유명한 연예인을 많이 부른다고 절대로 축제의 위상이 올라가지 않는다. 장미는 여성의날을 대표하는 꽃이기도 하다. 인간다운 삶을 상징하는 장미를 축제의 테마로 잡았다면 성별과 역할과 외모에 상관없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자리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기획자의 역할이고 진짜 축제의 모습이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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