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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강진구의 고전으로 보는 노동이야기](20)‘노조할 권리’ 뺏긴 장발장들, 공안 시각 못 버리는 한국 자베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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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1862)에서 “프랑스 혁명은 인간에게 제2의 영혼인 권리를 줌으로써 두번째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빵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는 육체보다 빛에 굶주려 죽는 영혼이 더 비통하다”는 말도 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으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체제를 무너뜨리면서 시작된 프랑스혁명이 위대한 것은 빵이 아니라 권리를 전 인민에 나눠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고는 노동을 하나의 권리로 보장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지난 11일 대구에서 환경미화원 체험에 나선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빅토르 위고는 ‘신이 부여한 권리는 법률로도 뺐을 수 없다’고 한 반면, 황 대표는 ‘교회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겐 교회법이 노동법보다 우위’라는 주장을 했다. 자유한국당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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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팔에 공장을, 모든 능력에 학교를, 모든 지성에 실험실을 열어주는 위대한 의무에 집단적인 힘을 사용할 것, 임금을 올릴 것, 노고를 줄일 것. 이것이 정치상 필요한 것들 중에 으뜸가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노동은 하나의 권리가 되지 않고는 하나의 법칙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소중한 권리로서 노동에 대한 위고의 생각은 주인공 장발장이 자신의 지갑을 털다 붙잡힌 10대 소매치기 몽파르나스를 타이르는 과정에 잘 나타난다.

노동은 수고·고통의 과정 아닌

창의·능력 발휘 활동적 삶 인식

권리로 인정 못 받을 때 형벌 돼


야간수당 못 받는 편의점 알바

주52시간 배제된 특수고용직

날품팔이 노동자 장발장 연상


법외노조 전교조 대표적 피해자

ILO 핵심협약 비준 막기 기도

패망 루이 필립 반면교사 삼길


“노동은 법칙이다. 따분하다고 노동을 거부하는 자는 그걸 형벌로 가질 것이다. 너는 노동의 벗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너는 노동의 노예가 될 것이다. 네가 정직한 피로를 원치 않는다면 죄인들의 땀을 흘려야 한다.(중략)대장간의 모루는 얼마나 빛나는가. 쟁기질을 하고 다발을 메는 것, 그것은 기쁨이다. 바람부는 대로 자유로이 가는 배는 얼마나 즐거운가.”

장발장은 노동을 수고스럽고 고통스럽기만한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창의와 능력을 발휘하는 자유롭고 활동적인 삶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노동이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받지 못할때 노동은 노예나 죄인이 감당해야할 형벌이 되고 더이상 긍정적 의미의 노동의 법칙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발장이 처음부터 노동에 대해 적극적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795년 체포될 당시 25살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그는 나뭇가지를 쳐서 하루 24수(1프랑 20수)를 벌었고, 가지치기 계절이 끝나면 잡역부나 소치는 일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장발장의 아버지도 가지 치는 일을 하다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산재로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준 누나도 남편을 잃으면서 거꾸로 장발장은 7명의 어린 조카를 부양해야 했다.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고 일거리가 없었던 그는 일요일 저녁 성당 앞 빵집 가게앞의 진열대를 지나게 됐다. 진열대 앞에 탐스럽게 놓인 빵들과 집에서 굶고 있을 조카들을 번갈아 떠올리던 그는 진열대를 부수고 빵 한조각을 훔쳐 달아나다 붙잡혔다. 그는 야간건조물 침입죄에 절도죄까지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수차례 탈옥을 시도하다 형이 가중돼 19년만인 1815년 나이 마흔세살에 출소했다. 그가 교도소에서 노역의 댓가로 받은 돈은 109프랑 15수. 가치치기를 하던 시절 100일치 품삯도 되지 않는 돈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수감 시기를 1795년으로 설정한데는 이유가 있다. 1795년은 보수적인 부르조와공화정이 헌법을 개정한 해다. 이로인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1789년의 인권선언은 ‘평등은 법적 테두리안에서만 가능하다’로 후퇴했다. 위고는 “신의 손가락이 모든 사람의 이마 위에 써놓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장발장의 생애서 지워버린 것은 법률이었다”고 지적했다. 재산권을 인권에 비해 과도하게 강조한 부르조와 법률이 부지런한 사람에게 조차 빵을 제공하지 못한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했다는 것이다. 그는 ‘법이 곧 정의’라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 “권리가 곧 정의”라고 반박한다. 법률은 인간의 글씨로 쓰여진 것인 반면 권리는 신의 글씨로 쓰여진 것이라 법률로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장발장은 단지 오래된 소설속 주인공 만은 아니다. 지금도 법률의 이름 아래 권리를 빼앗긴 장발장들은 수 없이 많다.

CU와 GS25 등 양대 편의점만 봐도 한해 5000억원 가까운 영업이익이 발생하지만 심야노동을 하는 4만여개 편의점 알바 노동자들은 5인미만 사업장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연장·야간노동 수당을 못받고 있다. 화물·택배 기사, 방송사 프리랜서 등은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유로 주52시간 적용대상에서 배제돼 과로사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상여금을 매월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면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상쇄시킬 수 있도록 법이 ‘꼼수’를 허용하면서 임금이 동결되거나 깎여 냉가슴 앓는 노동자들도 속출하고 있다.

경향신문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에서 탈주범 장발장을 쫓던 형사 자베르는 죄수를 법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공적의무보다 더 높은 의무가 있다는 것에 괴로워하다 센강에 몸을 던진다. 반면 노동문제를 공안시각으로 접근하는 한국의 자베르들은 노동자의 권리보다 정치적 고려나 시장의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14년째 불법파견 시정명령이 방치되는 것에 항의하다 거꾸로 폭도로 내몰린 현대·기아·GM 사내하청 노동자, 청와대와 대법원 ‘공모’에 의해 6만명 조합원 중 9명의 해직자가 있다는 이유로 법외노조로 내몰린 전교조, 교섭대표노조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채 9년째 부당노동행위에 시달리는 유성기업 노동자는 한국적 자베르들의 대표적 피해자들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증오심으로 사회를 처벌하리라 다짐하다 출소후 만난 비앵브뉘 주교를 통해 신이 부여한 권리에 눈을 뜨게 된다. 주교는 전과자라는 낙인때문에 마을주민들로부터 냉대를 당한 장발장이 자신의 집을 찾아올줄 알고 미리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그는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헌병들에게 잡혀온 장발장에게 ‘왜 은촛대는 그냥 두고 갔느냐’며 두자루의 은촛대까지 내주었다. 장발장이 19년간 강제노역 댓가로 받은 돈의 대략 두배쯤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헌병이 돌아간뒤 주교는 사회가 법률을 내세워 훔쳐간 것 중 일부를 신의 이름으로 되돌려준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장발장, 나의 형제여. 당신은 이제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이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값을 치렀소.” 하지만 비엥브뉴 주교와 달리 우리사회는 국가기관이 외면하거나 법률로 빼앗은 노동자들 권리에 자신들이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다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대형교회의 장로나 목사들은 심지어 법률로 보장된 노동자들의 권리를 신의 이름으로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장로출신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2012년 펴낸 ‘교회가 알아야 할 법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보다 크고 앞서기 때문에 교회법과 세상법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경우 세상법보다 교회법이 우선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최근 쓰레기 수거차량에 매달려 민생체험 이벤트를 연출했다가 환경미화원들로 부터 ‘노동을 모욕하지 말라’는 비난을 받았던 황 대표는 만약 위고가 살아 있다면 ‘신을 모욕하지 말라’는 꾸지람까지 받았을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오늘날 당연시되하고 있는 노동법적 권리들이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히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비엥브뉴 주교로부터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이후 특별한 흑구슬 제조법을 발명해 공장 경영주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 장발장은 굶주린 사람이 찾아오면 노동자로 고용하고 노임을 올려 지역사회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하면 주민들을 위해 병원과 유치원을 세우고 늙고 병든 노동자를 위해 구제기금을 조성했다. 장발장의 흑구슬 공장은 19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사른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마지막 꿈이기도 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8개월 전인 1970년 3월 대학노트 30여페이지 분량의 일기장에는 어린 직공들에게 인간적인 처우를 하면서 값싸고 질좋은 제품을 공급하기 위한 피복업체 설립계획이 꼼꼼하게 메모가 돼 있었다. 하지만 전태일의 꿈이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발장의 흑구슬 공장도 위고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프랑스에서 노동이 하나의 권리로 자리잡은 것은 수많은 피와 희생의 결과다. 레미제라블에는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린 1830년 7월 혁명과 제2공화정을 연 1848년 2월 혁명 사이 노동자들이 보편적 투표권과 단결권 쟁취를 위해 일어났던 1832년 6월 혁명이 등장한다. 이 봉기는 1830년 7월 혁명에 의해 집권한 입헌군주 루이 필립이 정규군 2만명을 동원해 리옹 노동자 봉기(1831년)를 진압한 후 노동조합 설립을 ‘사회질서 파괴행위’로 규정하고 단결금지법을 만든 것이 배경이 됐다. 1832년 6월 파리시내에는 노동자들의 대부였던 라마르크 장군 장례식을 계기로 혁명의 정신을 배반한 루이 필립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면서 바리케이드가 곳곳에 만들어진다. 레미제라블에서는 37명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정부군과 맞서 이틀간 시가전을 벌인다. 핵심은 파리의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ABC 벗들’이었다. ABC 벗들에는 부채를 만드는 노동자 푀이가 있었다. 푀이는 하루 간신히 3프랑을 버는 처지였지만 세계를 해방한다는 인류애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부군을 상대로 자신들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다. 위고가 ‘시대를 초월한 이상의 신부(神父)’로 표현한 22살 시민군 대장 앙졸라의 최후 연설은 “19세기는 위대하지만 20세기는 행복할 것”이었다. 16년후 1848년 2월 파리노동자에 의해 7월 왕정은 무너지고 임시정부는 노동을 통한 생계보장과 함께 노동자의 단결권을 승인한다. 앙졸라의 유언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1832년 반란의 수령들, 특히 샹브르리 거리의 젊은 열광자들이 싸웠던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침해, 권리에 대한 특권의 침해였다.(중략)빛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기쁨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빛 속에서 괴로워한다. 지나치면 탄다. 불길은 날개의 적이다. 날기를 그치지 않고 타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재의 기적이다. 알때도 사랑할때도 그대는 여전히 괴로워 하리라. 빛은 눈물속에서 태어난다.”

앙졸라의 최후는 1969년 ‘바보회’를 조직해 청계청 의류상가의 잔혹한 노동실태를 바꿔보려다 결국 자신을 태워 버린 청년노동자 전태일을 연상시킨다. ‘사람은 빛속에서 괴로워한다. 지나치면 탄다’고 했던 위고의 말은 전태일의 운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는 위대하고 20세기는 행복할 것’이라던 ABC벗들의 비원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의 유언에도 우리 사회에서 ‘노조할 권리’는 아직 모든 노동자들의 보편적 권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위고는 군주제와 공화정 양쪽에 다리를 걸치려다 몰락한 루이 필립을 두고 “권리는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분의 것이고 모든 것이 한쪽에 있다”고 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노동기구(ILO)핵심협약 비준을 아직도 거래와 흥정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루이 필립을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한다.

<시리즈 끝>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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