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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김기천 칼럼] 기본 전제부터 틀린 '소주성'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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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저성장, 저물가 상황에서 (한국처럼) 최저임금만 급격하게 상승한 것은 해외에서 전례를 찾기 어렵다.’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은 실제 임금 상승에는 기대만큼 영향력이 크지 않았고, 고용에는 다소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고용 증대와 임금 격차 완화를 위해서는 상위 계층 노동자의 임금 조정이 있어야만 한다.’

급진 운동권 단체들을 대표하는 사회진보연대의 부설기관인 노동자운동연구소에서 최근 내놓은 보고서의 내용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대범한 운동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가다. 그런 좌파 이론가도 소득주도성장은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고 임금 격차를 완화시킬 수 있는 해법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 대해 "시장의 반격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이미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은 올랐지만, 고용 자체가 줄어 전체 노동자 계층의 ‘임금 총액’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위원회의 ‘결단’으로 저임금과 임금 격차를 뒤집겠다는 것 자체가 미망(迷妄)"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최근 국내 경제학계에서 벌어진 소득주도성장 관련 논쟁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에는 근로자 임금과 관련해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있다. 한편에는 대기업과 공공기관 주도의 고임금 구조가 국가 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경제는 성장하는 데 근로자 실질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후자의 주장은 청와대 박종규 재정기획관이 2013년 금융연구원 재직 시절에 쓴 ‘임금 없는 성장과 기업 저축의 역설’이란 논문이 시발점이다. 박 기획관은 논문에서 과거에는 실질 성장률과 실질임금 증가율이 엇비슷하게 움직였지만 금융위기 이후 서로 갈라지며 점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구체적으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동안 연평균 실질 성장률은 3.2%인 데 비해 실질 임금 증가율은 0.5%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기업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계는 가난해지고 있다고 했다. 당시까지 막연하게 거론됐던 ‘임금 없는 성장’을 입증하는 실증 자료를 제시했다고 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서강대 경제학과 박정수 교수가 최근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경제성장률을 산출할 때는 물가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GDP 디플레이터’를 사용한다. 실질임금 증가율을 계산할 때는 흔히 소비자물가상승률을 사용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기준을 사용하는 바람에 실질임금이 성장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오해가 발생했다는 게 박 교수의 연구 결과다.

박 교수는 같은 기준을 사용해 다시 계산하면 경제성장률과 임금증가율의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경제가 성장한 만큼 임금도 올랐다는 것이다.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논리다. 결국 ‘임금 없는 성장’은 작은 실수가 빚어낸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고, 허망한 논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소득주도성장론자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 교수의 지적을 외면하며 침묵하거나 억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자영업자의 소득 일부를 노동소득으로 간주해서 만들어낸 ‘조정 노동소득분배율’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소득주도성장을 변호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조정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은 ‘제살 깎아먹기’식 과당경쟁 등 여러 이유로 자영업자의 소득이 줄어든 탓이다. 근로자 임금과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노동소득분배율과 기업 부가가치 중 인건비 비중은 꾸준한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경제가 성장한 만큼 임금도 올랐다는 박 교수의 분석과 일치한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이라는 허구에 사로 잡혀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밀어붙였다. 자영업자의 소득 감소를 최저임금 인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자영업자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고, 고용 참사와 소득 불균형 악화 등의 연쇄 부작용이 나타났다. 첫 단추를 잘못 꿴 탓에 줄줄이 사달이 난 것이다.

정부는 최저임금 정책이 부작용을 낳자 이를 보완하는 대책을 내놓으며 시장에 더 깊숙이 개입했다. 자영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일자리 안정자금을 뿌리고 신용카드 수수료와 임대료 규제를 강화하는 식의 무리수가 줄을 이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면서 민간의 활력은 점점 더 위축됐다.

정부가 허드레 일자리까지 만들어내며 고용 창출을 책임져야 할 정도로 국진민퇴(國進民退)의 역주행이 벌어졌고, 이는 결국 성장률 쇼크로 이어졌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념적 편향과 소득주도성장론의 원초적 오류, 충분한 검토와 준비 없이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인 정치적 만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와 여당은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론의 기본 전제가 무너졌는데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고 있다. 최악의 경제지표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우리 경제가 성공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어깃장을 놓고 있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런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조선비즈 논설주간(kck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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